“이제 은퇴해야겠어. 요즘엔 나 찾는 감독도 없고….”
18일 경기도 남양주 서울종합촬영소 소품실에서 만난 영화 경력 45년의 소품 전문가 이예호(76)씨는 우는 소리부터 했다. 50만여점의 소품들이 빼곡히 들어찬 이 소품실(1200평)은 그가 아끼는 ‘보물창고’. 고령(高齡)임에도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이씨는 최근 개봉된 영화 ‘청풍명월’의 소품을 맡으며 8년 만에 충무로로 돌아왔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두 무사(武士)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시대극답게 창·칼 등의 무기부터 용상·어물 등의 대도구, 형틀·곤장 등의 형구, 장군모·대감갓 등 인물소품, 문갑·병풍 등 가구까지 모두 1만5700여점의 소품이 투입됐다. 특히 5000만원을 들인 어연(왕이 타는 가마)은 밤샘 작업을 하며 제작에만 4개월이 걸렸다.
“새로 만들어 쓴 게 1만점이 넘어. 내가 소품을 한 100여편 중에 이만큼 공을 들인 영화가 없었지. 목수까지 20명이 꼬박 2년 동안 잡고 땀을 쏟은 일감이니까.”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6·25 때 월남한 이씨는 영화 소품일을 하는 육촌 형을 가끔씩 돕다가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소품 제작자로 나섰다. 첫 번째 영화는 신영균·윤정희 주연의 ‘여진족’(감독 이규웅). 이후 설태호 감독의 ‘원산공작’(1974),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1985),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1986),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등 100여편의 영화에서 소품을 맡았다. 열에 아홉은 시대극이나 전쟁영화였다.
‘외도’가 왜 없었을까. 고되기만 하고 벌이는 시원찮은 일이 싫어 1971년부터 2년쯤 서울 장위동으로 들어가 구멍가게를 했다. 그는 “구멍가게가 그럭저럭 잘 됐지만 손 놓고 남의 물건 떼다 파는 게 적성에 안 맞더라”며 “마침 1970년대 중반부터 무술 영화가 때를 만나 한 해 7~8편의 영화에 소품을 대며 신바람을 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속정이 깊어 소품일을 아주 그만둘 수 없었던 것 같다고도 했다.
1995년에는 창고에 불이 나 30여년간 모은 소품 20여만점(추정 재산피해 10억원)이 잿더미가 됐던 아픈 기억도 있다. ‘연산군’에 나왔던 소가죽으로 장식한 화각장 등 애지중지하던 소품들 중 95%를 잃었다고 한다.
“촬영장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창고로 달려갔지. 아직 불길이 덜 잡혔어. 무슨 말이 나오겠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
그때부터는 일감도 줄고 영 내리막길이었다. 지금 창고에 있는 소품들 중에는 여기저기서 기증받은 것들도 적지 않다. 이씨는 요즘 시대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게 많다.
“시대극은 우리 풍습과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기회거든. 철저한 고증을 거쳐 소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요즘 TV 사극 등을 보면 날림으로 한 게 많아. ‘저게 아닌데…’ 싶을 때가 부지기수야.”
45년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을 세월이다. 이씨는 자신이 땀 흘려 만든 소품들이 캐릭터와 배경에 딱 어울리며 스크린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더없이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영화에서 소품이란 뭘까.
“캐릭터와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게 소품이야. 그런데 소품만큼 어두운 데서 일하고 푸대접받는 분야도 없지. 그래도 버틴 건 영화가 좋으니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