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소녀 백서(Ghost World)’ 속엔 비주류 영화만의 매력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음울하지만 비범한 남자배우 존 말코비치가 제작을 맡았고, 원작은 언더그라운드풍 만화 ‘고스트 월드’. 그래서인지 잿빛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판에 박힌 세상의 중심을 향해 차갑고도 쌉쌀한 웃음을 날린다. 세상 남자를 다 우습게 알던 18세 맹랑 소녀 이디드와 40세가 되도록 여자친구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괴짜 아저씨 시모어의 교감은, 한꺼풀 깊이 삶을 응시해 본 사람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다.
특히 건달 이미지를 벗어던진 스티브 부세미가 열연한 남주인공 시모어의 쿨 가이(cool guy)적 매력은 따분한 속물 세상에 질린 관객들 눈을 붙든다. 구식 레코드를 수천장씩 수집하는 별난 취미를 가졌지만, 음악을 알고 예술을 아는 사내. 이 괴상한 매력의 사내를 알아보는 건 역시 괴상한 소녀 이니드다.
둘이 만나 교감하는 초반부에 중요한 매개물이 있다. 시모어가 소녀 이니드에게 파는 레코드 한 장이다. 시모어의 좌판을 기웃거리는 소녀에게 시모어가 중고 LP 음반을 권한다. “‘멤피스 미니’의 앨범이야. 한번 들어봐.”
멤피스 미니. 30년대 전후 시카고에서 인기를 누렸던 옛 블루스 가수다. 소녀가 시모어로부터 사온 이 음반은 둘 사이 소통의 문을 연다. 소녀는 휘청이는 듯한 노래가 끈끈한 기타를 타고 흐르는 노래들, 특히 ‘데블(Devil)’을 몇 번이고 듣는다. 소녀는 음악에 끌리고, 시모어에게 끌린다. “내가 혐오하는 자들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뭘 가진 자보다는 많이 잃어 쓸쓸한 자의 정서에 어울리는 블루스 선율이 이 영화만의 분위기를 돋운다. 블루스는 이 영화를 만든 감독 테리 위고프의 취향이기도 하다(이 감독은 무명의 블루스 뮤지션에 관한 다큐로 데뷔했다).
작년 국내 개봉한 ‘판타스틱 소녀 백서’는 이미 비디오로 나와 있지만 개봉 때 조기 종영된 것을 안타까워 한 팬들 성원을 업고 최근 다시 극장 개봉됐다. 열성팬들도 많지만 결코 대중적이지 않은 블루스 음악의 운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