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의 길

(도나미 마모루 지음/허부문·임대희 옮김/소나무/1만3000원)


풍도(馮道·882~954)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변절자이자 간신의
전형으로 손꼽혀온 인물이다. 당나라 멸망에 뒤이은 5대10국의 혼란기에
다섯 왕조에 걸쳐 11명의 군주를 섬긴 이력 때문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을 신하의 도리로 여긴 유자(儒者)들은 풍도를
신의 없는 배신자로 몰아붙였다.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는 제 아무리
재능이 많고 공적이 빼어나도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소중한 절개를 잃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의 정통 사학자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풍도를 평한 구절이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탁오
정도가 『풍도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했다』며
변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탁오는 당대에도 이단으로 몰릴 정도로
비주류였다.

교토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살아간 지식인 풍도의
삶을 당대의 사회와 연결시켜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풍도가 활동한
5대10국은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후부터 960년 송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반세기다. 화북에선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차례로 등장했고,
화남에선 오, 남당, 오월, 민, 형남, 초, 남한, 전촉, 후촉, 북한 등
10나라가 있었다. 쿠데타와 전쟁이 밥먹듯이 되풀이되던 시기였다.

스물여섯에 유주 절도사 유수광 아래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풍도는 40대
중반 후당의 재상이 된 이래 30여년간 고위직으로만 떠돌았다. 그가 섬긴
왕조 중엔 돌궐계 부족이 세운 후진은 물론, 이민족인 거란도 포함돼
있다. 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유교 지식인들이 풍도를 더욱 거세게 비난한
것은 이런 이유도 크다.

풍도의 생존전략은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다.
군사력을 장악한 절도사 등 무신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풍도는 일찌감치
문신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했다. 최고위직에 올라서도 군사 일에 관여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인 그가 빈번한
왕조교체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용된 이유는 역시 덕망과 능력
덕분이었다. 「책부원귀」는 『풍도는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해서, 어떤
뇌물도 받지 않았다』고 풍도의 인간성을 평한다.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당적을 바꾸는 요즘 철새 정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풍도에게서 「2인자의 철학」을 끄집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잦은 정권 교체 속에서 온갖 비난을 뚫고 살아남은
풍도의 처신은 주은래와 김종필, 나아가 요즘의 고건 총리까지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풍도의 초상화.

하지만 풍도는 섬길 만한 군주가 제대로 없던 당시 상황의 산물이었다.
풍도는 만년에 쓴 자서전에서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했다』고
회고했다. 저자는 풍도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 군주가 아니라, 나라 곧
백성이었다는 데 주목한다. 오대와 같은 난세에 하나의 왕조나 한 사람의
군주에 대해서만 무조건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면,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백성이 주인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풍도를 다시 적극적으로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