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태릉실내빙상장 입구. 오후 8시가 다가오자
경쾌한 소프라노 고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언니 오늘 일찍 오셨네. 차가 안 막혔나봐?”
"버스를 탔다가 지각하는 바람에 오늘은 전철에서 내려서 택시를
탔지."
즐겁게 수다를 떨며 빙상장 안으로 들어서는 각양각색의 이들은 나이도
제각각이다. 정장 차림의 말쑥한 20대 후반 여성이 있는가 하면 교복을
입은 '깻잎머리' 여중생도 보인다.
늦은 저녁 태릉실내빙상장을 찾은 이들은 모두 22명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5년 전 창단한 국가대표지만 일곱 번 출전해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실업팀은 물론이고 초·중·고등학교 어디에도 여자아이스하키팀을 가진
곳은 없어 순수 아마추어로 구성된 유일한 국가대표팀이다. 신분도
제각각이고, 벅차고 낯선 아이스하키에 입문하게 된 동기도 저마다
다르다. 주장 이경선 (28)은 고려대 아이스링크 스케이트 강사.
인라인스케이트 선수를 하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이스하키로
전향하게 됐다. 간판스타 황보영 (24)은 북한에서 한국의 대표팀 격인
'국가종합팀' 선수로 활약하던 정통파 아이스하키 선수로 97년
중국으로 탈북, 99년에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출신. 지금은 국군공보원
방송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출신인 박규영 은 네 살배기 아들을 둔 주부
선수. 역시 대학에서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던 조은현·김수연 은
초등학교 교사이고 정은주 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팀의 막내 격인
마상희 (15), 박미라 (15)는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이들 덕에 겨우
막내 신세를 면한 고채령 (16)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링크 밖에서는 정겨운 자매들처럼 수다를 떨지만 일단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에 들어서면 눈매에 섬뜩한 독기가 서린다. 언젠가는 이기기
위해서다. 헬멧에서 스케이트까지 12㎏이 넘는 중무장(아이스하키용
장비)은 어린 선수의 경우 거의 체중의 3분의 1이나 되지만 쓰러지고
뒹굴어도 누구도 신음소리 한번 내는 법이 없다.
2003년 아오모리 대회에서 30대1이라는 역대 최고 점수차 패배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이들의 각오는 더 뜨겁다.
그러나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각자 의지는 강하지만 낮엔 일이나 공부를
하고 저녁엔 버스나 전철 타고 링크장으로 와서 운동을 하는 '이상한
국가대표팀'이기에 훈련량이나 강도는 그만큼 약하다. 동계국제대회를
개최하려면 필요충분조건으로 여자대표팀이 있어야 하기에 98년
창단했지만 필요한 만큼의 지원은 거의 없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주3회 2시간씩 훈련에 필요한 링크장 무료사용과 국제대회 참가 전 한
달간만 나오는 선수들의 개인당 훈련비 1일 1만원이 전부다. 값비싼 장비
역시 파손되면 개인이 사야 하는 실정. 가장 싸다는 스틱 한 자루가 보통
5만~6만원 정도, 스케이트는 40만~60만원이나 한다. 더욱 갑갑한 것은
학생 신분인 경우는 학교팀이 없기에 상급학교로 특기자 진학도 아예
불가능하다. 대표팀 가운데 '가장 불운한 대표팀'으로 불린다.
"저희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은 저희가 말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 1승만이라도 거뒀으면 좋겠어요."
대표팀 중 유일하게 A매치 1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는 주장 이경선은
"우리가 가장 목마른 것은 단 한 번의 승리"라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1승 때문에 이들은 일과 훈련을 함께하는 어려움도, 주위의 무관심도,
견디기 힘든 스파르타식 훈련도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북한 출신 황보영은 "조금만 훈련 여건이 좋아지면 북한과 한번 붙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팀워크와 자세가 좋다"고 평가했다.
"실력차가 크기 때문에 당분간은 질 가능성이 높죠. 승리 못지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신승한 (35) 감독의 말이다.
밤 11시쯤 땀에 절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왔다.
“‘쿨 러닝’이란 영화 기억하세요?”
겨울이 없는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 팀을 만들어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던 실화를 다뤘던 영화 '쿨 러닝'의 몇 장면이
이들의 뒷모습에 자꾸 오버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