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현 동경특파원. <a href=http://db.chosun.com/man/>[조선일보 인물 DB]<

“관중석에서 구경만 하지 말고 운동장에 내려와 플레이를 해달라.”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지난 10일 도쿄를 방문한
자리에서 야구경기에 빗대 일본의 '안보역할론'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아미티지는 1980년대 국방부 근무 시절부터 일본의 안보정책에 깊숙이
관여해온 대표적인 지일파(知日派)다. 그는 "1991년 걸프전에서 일본은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지만 그것은 야구로 말하자면 관중석에서 구경한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 특별법을 추진 중인 일본
정부를 응원했다.

그는 "이번에는 투수나 포수가 아니라 1루수나 유격수 역할"이라며
"관중석에서 내려와 운동장으로 들어오겠다고 한 것은 반길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한 신문은 "아미티지 부장관은
일본 헌법이 금지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고, 투수급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의 돈과 자위대의 공헌을 끌어내기 위해 은근한
압력이 가미된 다양한 '수사(修辭)'를 동원해 왔다. 미국측은 지난 4월
초부터 '부츠 온 더 그라운드(boots on the ground)'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일본 육상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을 요청했다. 앞서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위한 후방지원에 해상 자위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할 때는 '쇼 더 플래그(show the flag)'란 메시지를
일본에 보냈었다.

지난주 일본 국회에서 '전쟁대비법'인 유사법제(有事法制)가 통과된
것을 비롯해 일본의 군사화 추세가 한층 노골화되는 것도 미국이
9·11테러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일 동맹이 효율적으로
가동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강력하게 요청한 측면이 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내세워 강성 안보정책을 밀어붙이는 일본과, 일본의
역할 확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미국의 움직임을 그냥 남의 일 보듯 할
수만은 없는 게 한국이다.

(정권현·동경특파원 khj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