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라말라(Ramallah)로 가는 길. 팔레스타인 남성과 결혼했다는 영국인 여성 루시가 안내했다. 20년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난민지역을 오가며 평화교육을 하는 그녀는 “이 땅에서 폭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이스라엘군의 무장헬기와 장갑차의 폭격으로 아라파트의 집무실을 빼고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PLO 자치청사 건물의 잔해 앞. 무너진 건물 한쪽 좁은 운동장에선 팔레스타인 자치경찰들이 군사훈련에 열중이었다. 같은 시각 이들과는 달리 어쩌면 그 도시의 구석진 비밀 아지트에선 또 다른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비밀 무장단체를 찾아가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보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팔레스타인 사람을 감옥에 보내면 언젠가 다시 이스라엘 군대에 돌을 던질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팔과 손을 부러뜨리면 다시는 돌을 던지지 못할 것”이라고 떠벌리는 이스라엘 군사지도자들. 자신들의 군사적 점령과 혹독한 인종차별주의를 ’반테러전쟁‘으로 정당화하는 이들의 완고한 태도가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악착같이 폭력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긴 목총을 들고 철조망 밑을 기어가는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자살폭탄테러를 자원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너무 몰려 되돌려보내는 지경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놀랍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하루 전 달려갔던 지중해 해안도시 네탄야의 한 카페 앞에서 자폭하여 죽어 나자빠진 한 팔레스타인 젊은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정당하다. 그러나 억눌린 자들의 자포자기적이고 절망적인 폭력은 그 자명한 사실만을 되풀이하며 언제까지 계속 옹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개개의 인간에 대한 고려나 염치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부서진 레스토랑과 폭탄에 불타 나뒹군 마을 통근버스 앞에서 그 자명한 사실만을 반복하는 것은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라말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저녁, ‘우리 모두는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던 한 이방인 여성의 호소를 나는 오래 생각했다. 몇 개의 검문소를 통과하여 건너간 팔레스타인 거주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초라한 좌판을 앞에 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나이든 팔레스타인 여성의 크고 슬픈 눈빛도, 낯선 여행객의 주변을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맴도는 어린 아이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죽은 아이나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한 젊은 ‘영웅’과 ‘순교자’들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들이었다. 순교를 신성화하는 이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제의 앞에서 ‘인간은 표적도 아니며, 수단도 아니다’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거처를 얻을 수 있을까.
어제의 순교자의 얼굴이 담긴 낡은 포스터는 새로운 얼굴들로 교체될 것이다. “이스라엘인 중에 민간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죽일 정당한 권리가 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자살테러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대변인이 한 말이다. “순교자가 땅에 첫 방울의 피를 흘리는 순간 그는 곧장 천국으로 간다.” 하마스의 지도자들은 스무 살짜리 젊은이의 허리에 폭탄을 두르며 이렇게 장담했다.
억압받는 민족의 무장저항을 ‘테러’로 부르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는 지적도 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맞는 말이다. 억눌린 자들의 폭력이 강요된 ‘자기부재’에 대한 저항이고 인간적 삶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이 한 가족의 삶을 빼앗는 권리로까지 옹호될 수는 없지 않은가. 폭력의 흐름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한 폭력의 망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 폭력의 망을 찢는 언어와 몸짓이 우연적이고 무망해 보일지라도 그 가녀린 가능성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베들레헴 대학의 경영학과에 다니던 스물 살의 팔레스타인 여성 아리엔 아메드. 그녀는 수업시간을 빠져나와 폭탄이 장착된 배낭을 메고 유대인 지역을 향해 갔다. 이스라엘군의 침공으로 약혼자를 잃은 그녀는 ‘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직의 말을 떠올리며 거리에 섰다. 그러나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은 너무 파랬고, 거리에서 뛰어 노는 이스라엘 아이들은 사랑하는 연인을 앗아간 원수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길로 이스라엘군 초소를 찾아가 자수한 뒤 투옥됐다. 감옥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그녀가 했다는 말. “선량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고 있다. 어느 쪽도 생명을 해칠 권리는 없다.” 그녀의 이 말은 단지 가망 없는 감상일 뿐인가.
「당대비평」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