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고아들을 돌본 미군병사가 28일 50대가 된 당시 고아들과 극적으로 재회했다.(위) /黃晶恩기자 fortis@chosun.com 1951년 인천 작약도에서 미국 해군 순양함 세인트 폴 호 장병들이 고아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52년 만이었다. 한국전 참전용사 밥 보드(72)씨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인천 작약도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던 고아들이 이젠 중년이 되어 그 앞에 다시 선 것이다. 김광훈(64)씨 역시 희미한 기억 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는 ‘미군 아저씨’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27일 밤 9시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는 극적인 재회(再會)가 이뤄졌다. 한국전쟁 와중에 작약도 성육원 원생 45명과 인연을 맺었던 미 해군 순양함 세인트폴호 전우 2명과 미망인이 김씨 등 당시 고아 2명, 원장 아들과 해후한 것이다. 보드씨는 이들이 ‘환영 세인트폴 가족, 당신들의 진정한 친구(Welcome St.Paul Family. Your truly old friend)’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52년 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마중 나온 장장영(60)씨도 조용히 안경을 벗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보드씨 일행은 “우리는 행복한 대가족(We are big, happy family)”이라며 52년 전 느낌으로 이들을 뜨겁게 안았다.

1951년 1월 인천 앞바다에서 지상군 지원 함포사격을 하던 세인트폴호 병사들은 작약도에 상륙했다가 이곳에서 신음하는 전쟁 고아들을 발견했다. 밥 콜브(70)씨가 “누더기를 걸친 창백한 얼굴, 부서진 건물 사이로 비치는 처참한 풍경에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회고하자, 옆에서 장씨가 “당시 전쟁으로 지원이 끊겨 칡뿌리나 쓰레기를 주워 연명했다”고 말을 받았다.

병사들은 쌀과 통조림 등 식량을 모아 전달하고, 곳곳이 부서진 건물을 고쳐주는 등 정박한 10일 동안 고아원을 재건했다. 이선길(62)씨는 “그때 먹었던 비스킷은 그 어떤 산해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라고 말했다. 군수품으로 받았던 담요·비누·의류·신발 등도 나눠줬고, 폐렴과 척추장애로 고통스러워하는 고아들을 치료했다.

아쉬운 작별을 했던 세인트폴호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자 이들을 찾았다. 다시 도와줄 일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고아원은 없어졌고, 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에드윈 바르(2001년 작고)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난 2000년까지 '작약도 고아 찾기'를 계속했고, 그 노력은 이번 방문에 동참한 부인 트루디 바르(81)씨에게 넘겨졌다. 세인트폴호 전우들이 작약도 고아들을 찾는다는 사실이 신문을 통해 소개되자 기사를 본 당시 원생들 4명이 연락을 했고, 이메일 등을 통해 소식을 나누다 이번 상봉(相逢)으로까지 이어졌다.

트루디 바르씨는 “남편이 죽기 전에도 이들을 한번 보고 싶다고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보드씨는 “동료 30여명이 전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한국전쟁은 온통 공포의 기억뿐이지만, 고아들과 함께했던 시간만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김씨는 “고아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지만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분들이 찾고 있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김씨는 버스운전, 장씨는 세관공무원을 거쳐 운수회사에 있다 정년 퇴직했고, 원장 아들이었던 이씨도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물러났다. 어렵게 컸지만 꿋꿋이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보드씨 등 일행 3명은 28일 김씨 등과 함께 맥아더장군 동상과 추억의 작약도가 있는 인천을 돌아보았다. 부산을 거쳐 다음달 초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며, 여력이 있으면 김씨 등을 미국으로 초청해 '따뜻했던 그해 겨울'을 영원히 간직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