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날, '팔할이 바람'이셨던 아버지는 집 밖을 떠돌고, 어머니는
귀가하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부산 공동 어시장 근처를 맴도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 나설 때 나는 가장 명분있는 앞잡이였었다. '이
애를 봐서라도…'라고 아버지를 압박하는.
그러나 열 살 난 아이의 심정은 참담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꼴불견일 수밖에
없었다. 왜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집 밖으로 달아나려 하고, 왜 이
세상의 어머니들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애써 찾아다니는가.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날이 내게는 죽기보다 싫었다.
장판 방에 둘러앉아 도리짓고땡 화투판을 벌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 날은 그래도 좋았다. "아부지!" 소리치며 눈을 부라리고 서
있으면 아버지는 지전 몇장을 세지도 않고 그냥 쥐어 주셨다. 그런
날이면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돈만 챙겨서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게서 돈을 건네받고도 아버지 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서 계셨고,
한참을 그러고 서 있으면 어류 창고를 돌아 나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너 여기 좀 있거라'그러고선 사라지셨고, 나는 꽤 긴
시간을 무료한 느낌으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곤, 팔할이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 얼굴을 만나기 일쑤였다. 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는 만나면
저렇게 싸워야 할까.
훗날 나는 이것이 한국 근대 가족사의 한 단면이었음을 깨달았지만, 그
시절에는 어머니가 부르는 스산한 노래가 한풀이였었고 유일한 위로였다.
문맹자였던 어머니가 부르신 노래란 순도 백 프로의 구전 민요였고
우리의 노래였다. 1960년대의 초저녁 어스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때나 다투었을 때 부산 부둣가를 지나 연화동 산동네를 오르면서
어머니는 나직하게 노래하기 시작했고 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삼천리 강산 넓기는 해도 / 너와 나 갈 곳이 어디멘고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펑펑 나구요 / 요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나네…"
어머니와 나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기분도 울적하기 짝이 없어서
노래로 세상의 허기를 채우기라도 하듯 읊조리고 흥얼거렸다. 그렇게
흥얼거리다 보면 조금 편안해지고 가슴속에 따뜻한 화톳불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그럴때면 나도 빨리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버리지 않는 아버지가 되고 싶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윤택/연극연출가·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