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이라크 바그다드시 북쪽 아티아피아 지역에 있는 알 라지 병원.
대한적십자사와 조선일보사가 공동으로 파견한 '이라크 전재민(戰災民)
의료지원단'이라는, 아랍어와 영어로 쓰여진 대형 현수막이 오전 10시쯤
병원 안팎에 내걸리자마자,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주변의 이라크인
환자와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의료지원단이 병원 안에 마련한 진료실과 약국 등 5개 병실에는 진료
마감 오후 2시까지 발길이 끊이질 않아 이라크인들의 갈증을 실감케
했다. 4~5명의 일가족 전원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의사 권오명(權五明·여·28·가정의학과·서울 적십자 병원)씨는
"환자들이 의사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하며 뺨을 비비고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이라크에 수시로 부는 흙먼지바람 탓인지 어린이
중엔 목감기 환자가 많았고, 공통적으로 영양부족으로 인한 성장 부진
증세를 보였다. 이날 정신박약아 아지즈(9)의 엄마는 비타민이라도 구해
먹이면 아들이 호전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지만, 권씨의 진단으론
"미숙아로 태어난 뒤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해 이미 두뇌가 손상됐고,
커서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권씨는 "이웃에
사는데 차마 진단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겠다"는 동네 자원봉사
통역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과의사인 이수하(李守夏·28)씨를 찾아 온 40대 환자 2명은 이라크
전쟁이 남긴 전형적인 외상(外傷)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이들은 상담 도중에 갑자기 두 손으로 총쏘는 흉내를 냈고, 귀를 막기도
했다.
이날 한국 의료진의 진료를 받은 환자는 모두 54명. 환자 중엔 1980년
이래 거듭된 전쟁과 13년간의 유엔 경제 제재로 영양 부족과 각종 만성
질환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변성환(邊聖煥·37·외과) 의료지원단장은
"성인 중엔 천식과 고혈압, 당뇨, 류머티스 관절염 성인 환자와 성장
부진·정신 박약 어린이가 많았고, 모두 공통적으로 빈혈 증세를
호소했다"고 말했다.
한국 의료진이 마련한 약국 앞은 비타민제라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약사 유리(33)씨는 "시중에선 너무 비싸거나 아예
약이 없다면서 전에 받았던 처방전이나 빈 약통을 갖고 와 비슷한
약이라도 달라는 이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대퇴부 골절 수술 후 통증이
계속됐다는 노리아 모하메드(여·60)씨는 기초 의약품인 아스피린과 가스
제거제를 받고는 "코리아 최고"라며 한국 의료진들을 껴안았다.
이날 40도 안팎의 기온속에 에어컨도 없이 4시간 동안 환자들을 접수한
간호사 윤혜숙(尹惠淑·23)씨는 "몸짓으로라도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이라크인들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어 너무 기쁘다. 이제
요령만 생기면 더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한국 의료진은 앞으로 한달간 무료 의료 활동을
펼친다. 의료진은 또 새로 구입한 발전기와 냉장고, 세탁기, 심전도기
등을 한달 뒤 병원측에 기증할 예정이다. 한국 의료활동 소문이 퍼지면서
이 지역 치안을 맡은 미군은 발전기용 석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날 진료를 마친 이들에겐 수개월 이상의 장기 치료를 요하는
만성 질환자들의 치료 방안이 '숙제'로 떠올랐다. 의료진은 또 "많은
사람들이 식수(食水)와 건전한 음식문화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고
엄마들은 자녀의 체중도 몰라 앞으로 보건·위생 교육을 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