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어느날, H연예기획사의 이모(33) 실장은 소속 신인가수의 앨범을 홍보하러 모 방송사의 라디오국(局)을 돌고 있었다. PD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CD앨범 한 장씩을 전했다. “한번 꺼내보세요”라며. 앨범 속에는 10만원권 수표 10장씩 들어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마주친 선배 매니저가 조용히 이씨를 불렀다. “TV 가요프로를 맡고 있는 XXX PD가 3000만원이 급히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하지?” 이씨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재빨리 알아챘다. “뭐 제가 빌려드리죠. 형님 계좌로 넣어드리면 되죠?”
돈이 입금된 뒤 그가 데리고 있던 신인가수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2주 연속 출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이 바닥에서는 돈을 먹인 만큼 출연시켜주는 프로그램을 흔히 ‘자판기’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K연예기획사의 박모(35)씨는 “작년에 방영된 모 방송사의 주말드라마에 소속 중견 연기자를 출연시키려 했는데 외주 제작사측에서 3000만원을 달라고 했다”며 “겉으로는 연예계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가장 저질스러운 곳”이라고 덧붙였다.
작년 초, 가수·매니저 등 40여명이 모인 ‘대중음악개혁포럼’은 가요계 ‘PR비(촌지)’ 실태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연 적이 있다. 포럼에 따르면 연예기획사가 조성하는 PR비 규모는 가수당 1억2000만~2억원 사이. 촌지의 등급에서 간부급 TV PD의 경우 1억~1억5000만원, 라디오PD는 300만~500만원선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KBS 라디오의 조원석 제작센터장은 “지난해 라디오 제작2국장으로 있을 때 일부 그런 소문들이 들려 ‘기획사 사람과 외부에서 따로 만난다는 얘기만 나와도 강력 조치하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며 “요즘 PD들은 전문화되고 깨끗하다”고 말했다.
소속 연예인을 ‘스타’로 띄우기 위한 일부 연예기획사의 로비에는 골프 접대, 현찰, 성(性) 상납 등이 종종 동원된다. 우선 로비 대상은 지상파 방송사의 PD들. 로비자금 마련을 빙자해 소속 연예인에게 돈을 뜯어내거나 성 상납을 강요하는 연예기획사도 적지않다.
전문대를 졸업한 연기자 지망생 김모(26)씨. 그는 작년 8월 S연예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당시 사장은 “너는 다양한 이미지 연출이 가능해 곧 뜬다”며 자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름 값, 방송사 홍보비 등 명목으로 그는 800만원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연기 한번 못해본 채 6개월 만에 회사를 뛰쳐나와 현재 전단지의 모델생활을 하고 있다.
소속 여자 연예인의 성 상납은 소문만 무성할 뿐 거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다. S연예기획사의 이모(33)씨는 “저녁 먹거나 술 한잔 마실 때 PD가 신인 여자 탤런트한테 ‘조금 있다 같이 나가자’는 식으로 슬쩍 말하면 옆에 있던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SBS 예능국의 정순영 차장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PD와 매니저 사이에 촌지가 오가거나 성 상납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PD들한테 감정이 안 좋거나 자신들이 유용(流用)한 돈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매니저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러한 방송사와 연예기획사 간의 먹이사슬 구조도 가끔 바뀔 때가 있다. 최근에는 지상파 방송사가 스타급 연예인을 보유한 일부 연예기획사들에 수세에 몰리는 역전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그룹 HOT의 전 멤버 3명이 결성한 'JTL'은 작년 초 데뷔 앨범을 낸 뒤 지상파 방송에 한 달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방송사마다 이들에 관한 방영을 갑자기 취소하곤 했다. 일각에서는 "HOT 해체 과정에서 마찰을 빚었던 전 소속 연예사가 방송사에 압력을 넣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말 서울지검 강력부는 연예계 비리와 관련, “연예기획사 대표 등 39명을 적발, 16명 구속 기소, 12명 불구속 기소, 11명을 기소 중지했다”고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구속된 사람 대부분은 현재 보석으로 풀려나 다시 연예계로 되돌아왔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