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아침에 일어나고, 항상 하던 일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다가 어둑한 거리로 튕겨져 나오면 왠지 허전하고,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혹이 든다. 익숙한 이름들을 몇 개 떠올려 그중 하나에게
전화를 한다.
"별 일 없지?" "그냥…." "한잔 할래?" 예전에는 선약이 있다는
대답이 많았지만, 요즘은 "어디가 좋을까?"라는 대답이 더 많아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내가 현재의 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흔쾌히 응해주는 친구들도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술잔을 나누며 하는 짓은 대부분 서로가 현재의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봐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구박받았을 때에는 아내가 얼마나 부당한지에 대해, 능력에
의혹이 생길 때는 사회와 구조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는 나의
라이벌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더러운 방법으로 떼돈을 버는 것을 용납
못하는 나의 고매한 인품에 대해 얘기하며 취해간다. 대부분의 경우
로또로 인생을 역전하는 상상으로 끝나지만 말이다. 유치하다고
비난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이런 자위가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도 내가 좋은 사람, 대단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하는 모습과 살아가는 모습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노력이 느슨해질수록 타인들의 눈을 속이고 싶은 마음은
더 커진다. 타인들은 나를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삶에 몰두하고
있어 다행이지만 말이다.
(김창기·정신과의사·그룹 ‘동물원’ 前 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