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했다. 그러나 TV는 변하지 않는다.
'파편과 에피소드'로 너절하게 꾸려가는 토크쇼 같은 프로그램부터
전국민에게 바른 정보를 주겠다는 거창한 의도의 TV 뉴스까지 불변의
원칙이 있다. '불량'과 '결함'을 개의치 않는 점, 그리고
주문자상표부착(OEM)이라는 오랜 전통을 고수하는 점이다. 세상은 질로
승부한다는데 TV는 불량이건 리콜이건 이 모든 것을 개의치 않는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한 주인공들로 가득찬 아침 드라마는
물론이고 멀쩡한 정신으로 만들어야 할 뉴스조차도 그렇다. 지난 4일 세
지상파 메인뉴스를 보자.
KBS 9시뉴스에서는 '비생계형 주부 탈선, 가정파괴 속출'이란 제목의
보도를 했다. 기자는 화끈한(?) 인터뷰를 여과없이 편집했다.
나이트클럽에서 한 주부는 "지금 물이 한참 올랐는데… 미련이 남아서
지금 이러고 있는데 이 오빠는 나보고 집에 가래요"라고 말한다. 부킹을
주선한 종업원은 "여자들 집에 안 가요. 혹해 가지고 여관으로 바로
가기도 하고…." 그리고 결론은 '주부탈선이 도를 넘고 있다'였다. 온
가족이 마음 놓고 9시뉴스를 보다 어린아이의 눈과 귀를 가렸을 법하다.
'가정의 달 5월'에 현장 추적보도이지만 주간지용의 불량기사와 과연
무엇이 차별되는가? SBS 8시뉴스는 "일부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어린이 전용화장품을 사준다"고 했다. 기자는 주말에는 매출이
70만~100만원이나 되고, 어린이용 손톱 다듬기세트가 10만원이 넘는다며
일찍부터 겉치레와 사치를 배울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했다.
풍요로운 도시 아이도 눈이 휘둥그레 커질 일이지만, 곤궁한 농촌
아이라면 세상을 충분히 원망할 법하다. '극히 일부'의 무분별한
소비행태를 재밋거리로 보도하기 전에 내 딸이 보면 어떨까 사려깊게
생각해 볼 '생산자 윤리'가 필요했다.
MBC 뉴스데스크는 '노무현 대통령이 골프를 친 이유'를 보도했다.
대통령의 여유와 건강, 골프 금지령이 내렸다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
소비 진작을 위한 재계의 권유, 해외 투자자를 안심시키려는 의도 등등
대통령이 골프를 치는 데 저토록 많은 이유가 필요하구나 하고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리포트였다.
그러나 이 보도에는 단 하나의 인터뷰도 없었다. "~카더라" 식으로
일관했다. 아무개 수석은 이렇게 말했고 재계는, 그리고 대다수
서민들은… 식이다. 그리고 결론은 "일반인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오전 5시 반에 라운딩을 시작해 10시 반에 골프를 마쳤다고
청와대는 밝혔습니다"로 역시 청와대를 인용해서 끝맺는다. 기자들은
발로 뛴다는데 그 기자는 현장에 있었는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다못해 시민들의 인터뷰도 딸 수 있는 것 아닌가? OEM으로 주문한
제품에 그저 목소리만 입히고 상표를 붙인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였나
싶었다.
전설적인 투자가 존 템플턴은 "성공하는 사람은 TV 뉴스를 보지 않고,
1년에 100시간 넘게 TV를 보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을 간단하게 뒤엎을 방송기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전여옥·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