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일씨는“노래뿐만 아니라 사업에서도 성공해 불우아동들을 많이 돕고 싶다”고 말했다.<a href=mailto:join1@chosun.com>/조인원기자 <


가수 혹은 사업가 윤수일이 아닌 '성공한 혼혈인' 윤수일(48)을
인터뷰하겠다는 요청에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가수 데뷔 27년이
지났지만, 단 한번도 그런 내용의 취재에는 응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땅의 고통받는 혼혈아동을 위해서"라는 간청 끝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윤수일씨의 고향은 울산시 장생포동. 이북 강계 출신의 어머니는 6·25
전쟁 때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진 채 월남, 이곳에 정착했다. 윤씨는
"어머니는 전쟁 직후 미국 공군 조종사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나를
낳았다"고 했다. 친아버지는 그가 한 살 되던 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연락이 끊어졌다.

5년 넘게 아이를 홀로 키우던 어머니는 아들의 호적문제로 고민하다,
동네에서 농사를 짓던 윤성환씨에게 재가를 했다. "한국에 와서 잠깐
연애를 하고 떠난 친아버지는 제게 의미가 없습니다. 날 친아들처럼
대해주고 키워준 그분이 진짜 내 아버지이지요." 그 은혜를 갚느라 그는
아버지를 위해 꼬박꼬박 제사를 챙긴다.

하얀 피부, 훌쩍 큰 키, 높은 코. 이 땅에서 혼혈인으로 사는 데 어찌
괴로움이 없었을까. 윤씨는 "어렸을 때는 피부색이 다른 채로 사는
것보다 다리 한쪽이 없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생각은 초등학교 5학년, 펄벅재단이 부산 하야리야 부대에서
주최한 혼혈아동 모임에 참석하면서 바뀌었다. "하얗고 까맣고 노란
애들 수천명이 함께 뛰어놀았습니다. 아, 혼혈이라는 게 나만의 불행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지요."

고향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따돌림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기타도
치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엔젤스'라는 그룹도 만들었다. 윤씨는
"그때부터 나는 학교 축제 때마다 불려다니는 '윤스타'로 통했다"고
웃었다.

고교 졸업 후 '진짜 음악'이 하고 싶었던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가출을 감행했다. 4년간 신중현 밴드에서 악기를 나르고 커피
심부름을 했다. 막간 가수로 무대에 올랐다가 쫓겨 내려온 적도 많았다.
그는 "혼혈인이라는 사실, 시골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고시공부하듯 음악공부를 했다"고 했다.

76년 전국보컬그룹경연대회에서 윤씨가 속한 팀이 최고 상을 받으면서
그의 음악인생은 급상승세를 탔다. 첫 앨범에 실린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78년 최고 인기가요로 선정됐다. 82년 '아파트' 앨범에는
직접 돈을 투자, 국내 가수로는 처음 '로열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내 음악을 좋아하게 된다면, 내가 혼혈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어떤 분야든지 주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00년 IT(정보기술) 붐이 일면서 윤씨는 사업가로 본격 변신했다.
경영악화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한 회사를 인수하면서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회사의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부도
직전의 회사 매출은 월 100억원까지 뛰어올랐다.

그렇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작년 10월 방문판매 법률 위반혐의로
그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 법원이 올 1월 '사기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고 위반 정도도 크지 않아 벌금형을 선고한다'고 밝혔지만, 이미
그의 회사는 매출이 10분의 1로 떨어진 상태였다.

윤씨는 "노래만 하던 사람이 경영을 맡으면서 몇가지 절차상의 실수를
했는데, 마치 내가 불법 피라미드를 해서 수백억원을 횡령한 것처럼
알려져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회사는 이제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회원들에게 나를 믿어달라고
호소한 진심이 통했는지, 회사 매출도 사건 전의 절반 수준을
회복했다"며 "아들 지호(23)가 준비하는 앨범이 나오면 '부자(父子)
콘서트'를 열어 나를 믿어 준 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할
생각"이라고 했다.

회사가 어려웠던 순간에도 윤씨의 혼혈아동에 대한 후원은 끊이지를
않았다. 펄벅재단 이지영(33) 사회복지사는 "사건 직후 회사가 어려웠던
순간에도 혼혈아를 돕겠다며 후원금을 가져왔을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삶은 길지 않다. 혼혈인이라고 삶을 비관할 틈이
어딨나"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