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구효서소설집/세계사/9500원)


다섯번째 소설집을 낸 작가(46)는 이전의 소설들과 이별한 듯 하다. 장편
'비밀의 문'이나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등에서
묵직한 주제를 다뤘던 구효서는 이 소설집에 없다. 소설집에 실린 11편의
단편들은, 인간이라는 개념적 조건이 아니라 '나' 또는 '개인'이라는
구체적 존재로서 만나는 '현장의 삶'을 다룬다.

표제작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에서는 아주 묘한 상황으로 자신의
딸과 첫 만남을 갖는 46세의 여행사 간부 이야기가 그려진다. 정길은
미국 여행길에 자기를 안내한 22세의 재미교포 처녀 미르를 한국에
초청한다. 미르는 정길에게 느끼는 연정을 털어놓고, 정길 또한 미르의
도톰한 입술에 눈을 파는 자신이 곤혹스럽다.

한 처녀가 엄마의 팬티를 입고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그가 동침을
요구하자 촌스러운 팬티가 부끄러워 거절한다. 화가 난 남자는 여관을
빠져 나왔고 여자는 상처를 입은 채 미국으로 간다. 그때의 남자가
정길이고 미르는 그 여자의 뱃속에 있었다. 미르는 할머니의 팬티때문에
사생아로 태어났다.

조심스럽지 못한 청춘이 만든 상처는, 적당히 무심해지고 세상에
너그러워지는 중년에 덧난다. '정길은 누구에겐가 무턱대고 사과하고
싶어졌다.'(37쪽) 여자는 '미르를 키운 것은 나도 당신도 아니고
세월'이란 말로 그를 위로한다.

또다른 소설 '흔적'은 곧 헐릴 고향집을 방문하는 어느 소설가의
회고담이다. 고향에는 6·25때 우익활동을 하며 이웃을 핍박한 소설가
재종 형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 상처의 증거는 고향집
기둥에 놋 주걱을 휘둘러 찍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소설가는
'그 집에 살던 형제들은 다 떠났다. 어머니 아버지는 선산의 땅 속에
묻혔다.…언젠가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나는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155쪽)고 말한다.

작가는 "삶 자체의 눈물겨운 풍경들에 무작정 발끝을 채여 덩달아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망정, 생의 비의를 파헤치려는 치열성 따위에는
점차 미련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소설은 힘을 빼서 유연해졌고,
묵직함을 버렸어도 진지함은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