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한동안 전염병을 잊고 살았다. 위생의 개선과 항생제·백신 등의
개발 덕분이다. 그러나 잠시 주춤했던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전열을
재정비해 대반격을 가해 오고 있으며, 인류는 고전(苦戰)하고 있다.
세계를 혼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은 '바이러스·박테리아 총공세'의
아주 작은 '전선(戰線)'에 불과할지 모른]
다.
에이즈·에볼라·유행성출혈열의 파괴력은 여전히 가공할 정도며,
웨스트나일·니파 같은 새로운 바이러스까지 출연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박테리아(세균)의 공세도 만만찮아서, 1994년 인도에선 사라졌다는
페스트가 창궐했고, 결핵과 성병 등도 지구촌 곳곳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21세기 인류는 결핵·성병·독감 등
'하찮게' 생각했던 전염병의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고 벌써 오래
전부터 경고해 왔다.
도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어떻게 최첨단
의학으로 무장한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바이러스는 유전물질을 전달하는 핵산과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로
구성돼 있으며 사람이나 동물 등 생명체에 기생하지 않고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 생체에서 벗어나 공기 등 '외부'로 나오게 되면
1~2시간 만에 파괴된다. 그러나 세포 속으로 침투한 바이러스는 자기
유전자를 복제해 폭발적으로 증식하는데, 이를 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바이러스가 스스로 증식을 중단하거나 독성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똑똑한' 바이러스는 '적당한
선'에서 숙주와 공존을 모색하고 증식을 중단하거나 독성을 약화시켜
왔다. 타협하지 않고 숙주를 죽여버리면 자신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는 대부분 숙주를 옮긴 변종 바이러스들이다.
오랜 기간 숙주와 평화롭게 공존하던 바이러스가 어떤 원인에 의해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숙주로 옮겨오게 되면 공존의 초기
단계에서 '교두보' 확보를 위해 강력한 독성을 내뿜는 것이다.
에이즈·에볼라·광우병(크로이츠펠트야곱병)·조류독감·니파뇌염·
웨스트나일열(熱) 등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바이러스는 모두
동물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에게 해를 입히지 않던 바이러스가
숙주를 사람으로 바꾸면서부터 치명적인 독성을 내뿜게 된 것이다.
한편, 1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박테리아는 바이러스와 달리 그 자체로서
살아있는 생명체다. 공기·물·땅속·생체 등 어디서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으며,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면 세포 분열을 통해 급속도로
증식한다. 2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탄저균의 경우, 땅 속에서
포자 형태로 잠복해 있다 증식 조건이 좋은 인체로 침투하면 급격히
세포분열을 해 병을 일으킨다.
결핵·파상풍·식중독·성병 등 박테리아가 일으키는 각종 감염병들은
20세기 초 항생제의 개발로 더 이상 인류에게 위협이 못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유전자 변이를 통해 항생제에 견디는 힘을
갖게 됐으며, 이에 질세라 인류가 보다 강력한 항생제를 개발하면,
박테리아도 뒤따라 내성을 획득해 왔다. 비관적인 학자들은 인류의
항생제 개발 속도보다 박테리아의 내성 획득 속도가 훨씬 빨라 인류는
항생제 개발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보건기구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 등은 인류와
바이러스·박테리아의 싸움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 ▲음식 가공의 대형화와 음식 공급의 세계화
▲인구증가와 도시화 ▲전쟁·기근 등으로 인한 인구이동 병원체를 보유한
동물·곤충의 서식지(특히 열대우림) 파괴 약물남용과 동성애 등
비정상적 인간행동 항생제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 등의 이유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전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스 바이러스의 출현이 인류가 직면할 거대한 재앙의 서막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도움말:송재훈·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교수, 우준희·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 이원영·연세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