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열혈남아'(1988)는 돌연히 나타나 홍콩영화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꿔놓았다. 기존 홍콩영화의 영웅적인 건달상을 조롱하는 이 사실적인
갱영화에서 관객들은 기이하게도 정착과 약속이 불가능한 자의 비애를
읽고 눈물 흘렸다. 그것이 1997년 반환을 앞둔 홍콩의 운명에 대한
은유라는 소문과 함께, 이 영화의 거친 화면과 격렬한 감수성은 90년대를
맞는 한국영화에 숨가쁘게 이식되었다.

●키워드 하나. 유행

왕가위만큼 '모방' 욕구를 자극하는 감독이 있을까. TV 프로그램과
광고는 '아비정전'(1991) 장국영의 맘보춤을 수없이 패러디했고,
'타락천사'(1995)에서처럼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를 맡으라고
유혹했다. 젊은이들은 '중경삼림'(1994)의 대사를 유행어로 만들었고,
삽입곡인 올드팝을 따라 불렀다. 문화적 기호로 동세대의 공기를
호흡하는 참신한 화법은 한국에서 1995년 하반기에만 '중경삼림'
'동사서독'(1994) '타락천사'까지 줄줄이 3편을 개봉시키는 이변으로
이어졌다.

●키워드 둘. 관계

왕가위 영화의 기본 정서는 군중 속을 홀로 망연히 가는 듯한
'고독'이다. 사람들은 우연히 만나지만 그냥 지나쳐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후회한다. "남에게 거절당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거절하는 것"이라 믿는, 사랑에 대한 두려움에는 버림받은 기억으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도사린다. 이들은 그 고통을 남에게
돌려주거나('아비정전', '동사서독'), 사물과
대화하거나('중경삼림', '타락천사'), 누군가와 잠시 함께
있는('해피투게더' '화양연화') 관계의 힘으로 견뎌낸다. 왕가위에게
사랑이란 엇갈린 길을 가며 스쳐가기, 그렇게 공유한 시간을 서로의
내부에 새겨넣기이다.

●키워드 셋. 시간

왕가위는 1958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호텔 지배인이 된 아버지를
따라 5세때 홍콩에 왔다. '화양연화'(2000)는 바로 그 해인 1962년
홍콩에 온 상하이 이주민들의 습속과 가치관을 통해 현재를 조명한다.
반대로, 곧 공개될 SF영화 '2046'(2003)은 자치기간이 끝나는 2046년의
거울로 홍콩을 바라본다. 이처럼 모든 왕가위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홍콩이며, 주제는 시간이다. 시간이 전편에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아비정전'은 홍콩의 불안한 자의식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다.
생모(중국)와 양모(영국) 사이에서 존재의 근원을 상실하고 떠도는
아비(홍콩)는 결국 한번도 숲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죽음조차 움직이는
기차 속에서 맞이한다. 운동을 분절시키거나 속도를 변형시키며 사적인
기억이 홍콩의 역사와 만나는 접점을 그려내는 왕가위의 영화들은 그
자신의 말대로 "한 영화의 각기 다른 장면과도 같다."

"내 영화는 우편엽서다. 한 권의 책은 될 수 없다." 현란한 이미지의
엽서 뒷면에 그는 지상의 버림받은 것들을 따스하게 품어주는 메시지를
타전한다. 슬픔을 묻은 채 집으로 가는 주인공들이 집을 찾아가는 노력이
곧 삶임을 보여줄 때, 그는 기억 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목소리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 속에서도 변함없는
희망은 있는 것이다.

(정소요·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