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소설집을 내는 송영(63)은 ‘극적인 반전이나 구호 대신에 낮지만 더 또렷이 들리는 저음 ’으로 삶의 세밀화를 그린다.

▲‘발로자를 위하여’

(송영 소설집/창작과 비평사/8000원)


사자후는 젊은이의 몫이다. 젊음은 주저 없이, 칼로 무를 베어 버리듯
사리를 정의한다. 베어낸 한쪽을 과감히 취하고 나머지 한쪽은 가차없이
버린다. 소설가 송영의 나이는 올해 예순셋이다. 소설집의 목소리는
조용하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8년여 동안 문예지들에 실었던
중·단편소설 9편을 묶어 낸 그는 "세상을 울리는 사자후는 내 몫이
아니다"고 말하는 듯하다.

표제작은 러시아 청년 발로자의 사연에 전환기 혼란 속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려넣었다. 발로자(블라디미르의 애칭)는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유대계 러시아인이다. 페트르부르크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나 꿈을 펼칠 공간인 동시에 그가 러시아 정신의 진수를
간직한 곳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공간이다. 1990년대 초, 그 공간에
공산당의 몰락과 옐친의 등장이란 거대한 사건이 끼어든다. 경제가
곤두박질하며 지식인들이 외부로 빠져나간다. 한국 여성과 사랑에 빠진
그는 동양학 지도교수로부터 "고향을 등지고 외국으로 도망갈 유력한
배신자 후보"라는 억울한 오해를 받는다. 동양학을 전공하는 엘리트
학생은 졸지에 미래를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날품팔이 지식 노동자로
전락한다. 발로자는 학생 시절 자신이 여행 아르바이트를 하며 안내했던
한국인에게 가끔 자신의 안부를 전한다. 낮은 곳으로 침잠해 가는 한
이국 청년의 신산한 삶은 이 한국인 화자를 통해 시종 낮은 목소리로
중계된다. 사회의 모순이나 시대의 불운을 화내는 열정은 없다. 대신
"다음에는 꼭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는다. 화자는 그
희망의 인사가 발로자의 아픈 신음임을 잘 알지만, 역시 분노하지 않고
그의 희망에 동조한다.

'두 사람'은 퇴직 은행원 류광현씨와 떠돌이 오씨 사이의 짧고 씁쓸한
만남 이야기다. 심장이 약해 축구경기를 보지 않으려 밖에 나온 류씨는
담배꽁초를 줍고 있는 오씨와 마주친다. 오씨는 류씨에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담배를 구걸한다. 오씨는 이상한 사람이다.
아내가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하고, 토박이처럼 굴다가 실은 작년에
굴러들어 왔다고 말을 뒤집는다. 하지만 류씨는 '사장님'이란 호칭과
제3자가 없는 둘만의 대화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거짓말에 기꺼이 동의해
준다. 오씨는 류씨에게 "존경한다"며 재회를 약속한다.

'천사는 어디 있나'에서 난쟁이 김정동은 술집 호객꾼으로 고달픈
인생을 살지만 착한 여자 만나 자식 낳고 사는 게 꿈이다. 김씨가 몸살로
앓아 눕자 예쁜 여자가 나타나 정성스레 간호한다. 둘은 급속히
친해졌다. 여자는 김씨에게 결혼조건으로 "가게를 사 달라"고
요구한다. 하숙집 동료인 이창수는 "그 여자는 동정씨가 구하는 천사가
아니다"고 말한다. 김씨도 "단념해야 할까요? 역시 그래야겠지요"라며
수긍한다. 섭섭한 결말이지만, 그게 실제 사는 모습 쪽에 가깝다.

송영의 소설은 극적인 반전이나 열렬한 구호가 없지만 대신 삶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며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아프게 꼬집어 낸다. 낮지만
더 또렷이 들리는 저음 스피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