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한국 고서들'(웅진북스 刊)이란 매력적인
제목의 책을 들고 저자인 연세대 국문과 허경진(許敬震·52)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창문 밖으로는 봄을 맞은 캠퍼스의 진달래와 개나리,
목련이 '하늘바라기'를 하며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이 한문학자의
방에서는 고문서 특유의 묵향(그는 먼지 냄새일 뿐이라고 끊었다)이
배어나왔다.
"하버드 대학 옌칭(燕京)도서관 한국관의 고서들은 4000여종이
넘습니다. 그 책들이 본격적으로 수집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부터지요.
그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의 이름은 하버드 중국-일본 도서관이었습니다.
간헐적으로 이곳의 고서들이 짧게 소개된 적은 있지만, 책으로 낸 것은
처음이지 싶네요."
'동국여지승람'의 체제를 본 따 만들었다는 1920년대의 인문지리지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가 신라, 고려, 조선 삼대의 명시를 모아 엮은 시선집
'조선삼대시'(朝鮮三代詩) 등, 이 책에서 그는 16종의 책들을 골라
소개하고 있다. 허 교수의 표현을 빌면 "규장각에도, 국립박물관에도
없는 귀한 자료들"이다. 나름대로 대량 복제가 가능했던 '활자본'이
아니라, 모두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베껴 써야 했던
'필사본'(筆寫本)이었던 까닭이다. "박영효는 '조선삼대시'에서
별로 뛰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시 '오가사와라로 가는 친구 김옥균에게
지어주다'를 끼워 넣었습니다. 이 필사본에는 그런 기록이 적혀 있는
거죠. 유배되어 떠나는 김옥균을 위로하는 척 하면서, 자신들 개화파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불러 일으키려 했던 의도 말입니다. 공식적인
활자본에서는 찾아내기 힘든 매력이죠."
이 책에는 단순히 그의 전공인 문학 이외에도 역사, 지리, 건축 등
다양한 장르의 자료들이 다뤄지고 있다. 허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조선시대의 문학과 지금의 문학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정리했다.
"지금과 달리 그 때의 문학은 문자로 쓰여진 모든 것이었다"면서
"나로서는 그 시대를 재구성할 수 있는 모든 자료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부안군 백산면 지주 집안의 10년치 추수 기록과
가계부', 조선 말기의 문신 한필교(1807~1878)가 평생에 걸쳐 재직한
관아들을 그림으로 그린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등이 이 책에 들어가
있는 이유이다. 허 교수는 "단순히 가격이나 서지학자들의
가치판단으로는 조선 전기의 활자본 불경들을 옌칭 도서관의 가장 귀한
자료로 치겠지만, 나에게는 별 매력이 없었다"면서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자료가 훨씬 더 의미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허 교수의 '옌칭도서관 짝사랑'은 벌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3년 하버드대학 동아시아학과를 처음 방문하며 이 곳 지하서고의
자료들에 매료됐고, 99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머무르면서
"미국학생들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지하서고에서 마음 놓고 책구경"을
즐겼다. 이후에도 방학 때마다 이곳을 방문하며 옛 책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이 책 '하버드…'는, 그 10년 연애의 결과물인
셈이다.
현재 하버드 대학 옌칭도서관에서는 이 4000종 우리 고문서들에 대한
해제와 귀중본 분류 작업이 2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곳 윤충남 관장은
서문에서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알려지지 못한 고서들이 전문가의
감식안에 의해 발견되고 심도있게 소개되는 것이야말로 소장도서의
진정한 가치가 확인되는 순간"이라면서 "체재하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먼지를 마시며 연구에 매진하던 허 교수의 열정이 낳은
성과"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