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전쟁을 반대한다. 대규모 공습으로 폐허로 변하고 있는
바그다드의 모습, '내가 왜 낯선 이곳에 와서 죽어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한 겁에 질린 포로들의 얼굴. 오폭으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뒤덮은 피눈물. 전쟁터로부터 우리의
안방까지 여과없이 전달되는 이 끔찍한 장면들을 보고서도 전쟁에 찬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쟁 자체는 그 어떤 이유로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분열시킨다. 우리의 가슴은
전쟁을 반대하고, 우리의 머리는 전쟁의 결과를 계산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도덕만으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우리는 평화와 인류애를 향한 우리의 가슴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라크 전쟁은'우발적'으로가 아니라
철저한 계산 속에 진행되었다. 미국이 국제법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포기한 것이 그렇고, 반전의 거센
물결이 미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명분 없는
전쟁을 감행한 것이 그렇다. 그 배후에 미국의 패권정치를 의심할 수 있는
여러 요인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테러지원 국가를 제거함으로써 세계 질서를 미국의 주도하에 재편성
하겠다는 의도가 가장 큰 요소일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이처럼 국익과 평화를 얻겠다는'전략적 계산'의 산물이다.
이라크 전쟁 파병을 둘러싼 논의는 바로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전쟁만이 전략적 계산의 산물이 아니라 평화 역시 '전략적 이성'의
열매이다. 이 땅에 평화를 실현시키려면 반전의 도덕적 감수성도
중요하지만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세력관계의 구축이 더욱 절실하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법적·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평화의 길은 없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평화는 국가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강제권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어느정도 자유롭게 말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미국이 우리에게 제공한 전쟁 억제력
덕택이다. 냉전 이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독선과 독주가
아무리 못마땅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강력한 강제권을 가지지 못한 유엔이 과연 국제적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국제법적 문제를 제기한다. 둘째, 세계의 양극화를
가져왔던 냉전체제의 종식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테러지원 국가의
탄생을 가능하게만들었다. 소련의 붕괴는 한편으로 미국을 견제할 국가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뜻하기도 한다.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공격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분명한 기호이다. 이것은 분명 국제법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현실'임에
틀림없다. 미국이 이번 이라크 전쟁을 반(反)테러 전쟁으로 명명하고,
유엔의 결의 없이 전쟁을 감행하면서도 스스로를 국제법의 집행자로
자처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이'악의 축'으로 지목한 북한과
대처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셋째,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영역에서도 갈등과 분쟁을
힘보다는 국제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민주주의'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 전체를 볼모로 삼는 전체주의 정권들이 대부분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 민족의 자유가 일반적 법칙에 따라서 다른 민족의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상태에서만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려는 정권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만 붕괴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반전(反戰)의 선명한 색깔은
민주와 비(非)민주의 구별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도 전체주의적 테러정권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의 뜨거운 가슴이 전쟁을 반대하지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전략적 이성'의 냉철한 머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한다.
(李鎭雨 계명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