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에서
무를 뽑는다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
나는
하얀 무를 들고
한참을 캄캄하게 서 있다

때로
너는 나에게
무 뽑은 자리만큼이나
캄캄하다

--김용택 [빈 들] 전문


김용택의 [연애시집](마음산책)은 제목 그대로 서정적인 연애시편을
묶은 것이다. 이 시인의 시가 대개 그렇듯이 소박하고 푸근한 그리고
조금은 감상적인 시들을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다
이 시에 이르러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얼한 느낌에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거듭 읽어본다.

무서리라는, 농경민족의 후예인 우리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풍경을
배음으로 깔고 있는 이 작품은, 흔히 그러하듯, 정겨운 추억이나
해학으로 연결되지 않고 읽는 사람을 돌연 삶의 캄캄한 심연으로 인도한다.
시의 화자가 무 뽑은 자리에서 발견하는 캄캄한 구멍, 존재의 허방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노을과 강물과 흩날리는 꽃잎을 배경으로
지나가버린 사랑의 흔적을 감미롭게 되새김하는 여타의 시편들과 구분되는
이 시의 암울한 정서의 근원은 어디일까.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실중의 하나는 욕망의 대상이 곧
불안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욕망이 클수록 불안도 커지며 욕망이
해소되는 순간이 흔히 죽음의 순간과 맞물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이란 구절이 암시하듯 이 시에서
"무 뽑은 자리"의 "캄캄함"은 거세 컴플렉스를 상기시킨다.
시의 화자에게 금지된 사랑은 상상적 거세 불안을 야기하며 그것은
빈들의 광막함과 어울려 텅빈 무(無)와 조우하게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무"라는 단어에서 "모"라는 단어를, 즉 어머니(母)를
연상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이 시인의 시에서 대지와
어머니의 육체가 겹쳐져 나타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그것이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더, 욕망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 좌절을 가져온다. 우리의 삶은 바로 그 캄캄한 심연 위에
연약하게 존재한다.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