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째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하고 그 중 10년 가까이 문화공보부, 문화부를 거쳐 문화관광부를 출입해 온 경험에서 볼 때, 문화관광부 기자실은 없어도 된다. 문화관광부 기자실이란 게 엄연히 정부 부처 기자실이긴 하지만 타 부처 기자실과는 다르다. 대단한 정보가 오고 간다거나, 고위 공무원들이 수시로 들러 정보를 흘린다든가 브리핑을 하는 곳도 아니어서 기자들이 거의 들르지 않는다. 다른 부처 기자실처럼 주요 신문사 별로 부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년에 몇번 장-차관이 뭘 발표하고자 할 때 등, 정부가 자기들 필요에 의해 기자들을 ‘불러모을’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란 측면이 강하다. 어쩌다 한 번 가보면 한 두 신문의 기자가 몇 주만에 한 번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문화관광부를 출입하면서 한 달 넘게 기자실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그래도 ‘별 탈’ 없는 게 문화관광부 기자실이다.
마찬가지로 문화부 기자들은 문화관광부 실-국장 등 직원들 방에도 다른 부처 출입기자들처럼 자주 들르지 않는다. 거기 들러봐야 신문에서 기사화할 만한 영양가 있는 내용을 주워들을 일이 가뭄에 콩나기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문화라는 게 정부가 무슨 거창한 정책을 내세운다든가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부 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문화의 창조자인 예술인이거나 이를 향유할 관객, 청중, 독자들이지 정부 관리들이 아니다. 지금 조선일보 문화부는 하루 평균 7개의 문화면을 만들지만 문화관광부에서 취재했거나 발표한 것으로 톱기사를 만드는 지면은 단언컨대 1년에 다섯 손가락도 안된다. 이쯤 되면 문화관광부 기자실은 불필요한 것 아닌가.
진실은 그렇다. 그런데 새로 취임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지난 주말, 취임 2주만에 기자 간담회를 가지면서 일성(一聲)으로 기자실을 없애겠다는 걸 발표했다. 또 기자들이 직원들 방을 드나들며 취재하는 것도 막겠다고 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은 있으나 마나 한 기자실을 없애는 게 ‘개혁’을 기치로 취임한 새 장관에게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돼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장관은 이날 언론 주무 장관으로서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발언을 했다. “어떤 언론이 다른 언론보다 먼저 중요한 뉴스를 포착하고 확인을 요구해도 담당 직원은 공식 발표 때까지 알려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는 기자들간의 치열한 취재 경쟁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감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 부정하고 기자 하향평준화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기자실을 폐쇄하고, 사무실 출입을 제한하며, 기자 취재시 보고를 의무화하겠다면 언론을 무력화하거나 재갈을 물리겠다는 의사로밖엔 볼 수 없다. ‘건전한 대언론관계 유지를 위하여 (공무원과) 기자와의 회식은 가급적 자제토록 함”이란 대목에 이르러선 실소와 함께 5공식 보도지침의 악령이 떠오르기까지 한다.
이창동 장관은 이날 자신이 성공한 장관이 될 것이냐 실패한 장관이 될 것이냐의 아주 중요한 1차 갈림길을 통과해버렸다. 문화예술인은 자존심과 독창성을 먹고 사는 것이다. 이장관이 감독한 영화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가 중요한 것은 그가 이때까지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간담회를 통해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보여준 것이 있다면 자존심 있고 독창적인 문화인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정치 공세에 신호탄이라도 쏘듯 나서는 길들여진 관료의 모습이다. 그는 비서관이 장관 승용차의 문을 열어주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과 청와대가 앞장서는 ‘언론 길들이기’에 덩달아 총대 메고 나서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조폭적’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공한 문화부 장관으로 남기를 바란다. 아직 몇번의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에게 한국의 앙드레 말로를 기대하는 시민들이 있다. 창작 역량과 열정의 절정에 있는 예술인을 정치판에 흘려 보낸 것만으로도 한국의 문화계는 이미 큰 손실을 입었다.
(金泰翼 문화부장 t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