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설
(이븐 할둔 지음/김호동 옮김/까치/2만5000원)
이븐 할둔(1332~1406)은 일반인들에겐 낯설지만, 서구 학자들로부터
'아랍의 마키아벨리' 혹은 '아랍의 몽테스키외'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표적인 이슬람 사상가다. 튀니스 출신인 그는 평생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떠돌아다니며 여러 왕조에서 정치에 몸담았고, 산전
수전을 겪은 후인 40대 중반 문명과 사회의 본질과 세계사를 담은
'성찰의 책'을 저술했다.
'역사서설'(아랍어로는 무캇디마, 즉 '서론'이라는 뜻)은 이 책의
서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아랍과 각 민족의 역사를 서술한 본론보다
오히려 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역사서설'은 역사학에 필요한 인간사회에 대한 지식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각종 원칙에 대한 이븐
할둔 나름대로의 관찰을 전해준다. 그는 문명, 인간의 성품, 왕조의
흥망, 도시의 생멸, 인간의 각종 생계수단, 당시 존재하던 학문분야들과
교육방법 등의 문제를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다루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근대 사회과학에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통찰력 있는 논지를 설파하여 현대인의 경탄을 자아낸다.
'역사서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문명'이다. 개인은 고립돼 생존할 수
없으므로 어떤 형태이든 사회 조직을 필요로 하는데, 이븐 할둔은 사회의
조직, 혹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을 문명이라고 불렀다.
애초에 그가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도 역사가 문명에 대한 정보이기
때문이었다. 14세기 북아프리카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그는 도대체 인간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변천하는가 하는, 문명의 기본 원리에 대한 강한 의문을
가졌다.
이븐 할둔의 문명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연대의식(asabiyya)과
왕조 흥망의 관계다. 거친 들판에 사는 부족은 강한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왕권을 획득하여 지배집단이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후 도회문명의
사치에 빠져 처음의 연대의식을 잃게 되면 새로운 연대의식으로 결집된
외부세력에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의 왕조수명론은
북아프리카의 자연과 사회환경, 그리고 이슬람세계라는 특수성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다른 전근대 문명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이슬람 문명을 대표하는 고전들이 거의 소개되지 않은 현실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중세 아랍인의 관점에서 이슬람 문명을 성찰한
이븐 할둔의 시각은 이슬람권의 각종 전통적 관념들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 만하다. 또한 이슬람권의 정치제도, 관료제, 각 직능집단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 미국에선 이븐 할둔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학술토론회가 열렸을
정도로 그는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부목받고 있다. 중동의
아랍-이슬람 전통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물론, 인간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이 책은 차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은정·서울대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