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전성시대다.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이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토론의 내용 평가는 뒤로 하고 단지 하나의
방송프로그램으로서 볼 때 이 '대통령과 평검사의 100분 토론(?)'은
기존 TV 토론의 한계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무엇보다 내용이 시원찮았다. 한 검사의 표현대로 '토론의 달인'인
대통령과 '토론의 아마추어'인 평검사들의 토론이지만 어느새 힘겨루기
내지는 대결의 장으로 바뀌어버렸다. 법을 다루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끼리 모여 하는 토론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내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주장을 하기에 바빴다.

두 번째의 패널의 자질이다. 누가 '달인'이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시청자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그 토론자들이
그 동안 한국 TV에서 가장 혜택받은 계층이라는 점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 토론프로그램은 이렇다 할 대학 교수들, 잘 나가는 법조계
인물, 내로라 하는 정치인 등 우리 사회 여론지도층, 파워엘리트들만이
독점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 훈련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만의 논리와 변함없는 독선과 개선될 여지가 안보이는 말꼬리 잡기로
일관했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 TV 토론의 고질병인 '상대에 대한 무례함'이다.
토론은 윽박지르기나 취조나 폭로의 장이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면 나의 의견은 이렇다'고
덧붙이는 교양인의 자기소통이다. 원래 진짜 권력은 실행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 역할을 한다. 진정한 권위는 요구하지 않고
납득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권력과 권위가 실종된 토론프로그램을 보는
것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답답한 일은 없다.

네 번째는 '유머'의 실종내지는 행방불명이다. 외국의 토론 프로그램은
대개 응접실의 소파에 편안히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한다. 때로는
패널들끼리 무릎도 맞닿고 어깨도 맞닿는다. 우리보다 땅넓은 나라에서
왜 그렇게 '좁게' 자리를 잡아넣을까? 바로 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으로서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기름칠을 하는 것이
바로 유머이다. 유머러스함과는 담쌓고 있는 한국의 파워엘리트를 보며
과연 앞으로 우리가 밝고 건강한 사회로 갈 것인지 의심치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유능한 사회자의 부재다. 토론의 핵심을 짚어주고 균형을
잡아주고 마침내 '눈부신 성과'를 건져내는 '사회의 달인'이 한국
TV에는 없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할지 알고 있다'며 말을 끊는
'달인'이나 '뭐 그렇게 시원찮은 이야기를 하느냐'는 '핀잔의
달인', 민감한 때, 기민하게 힘이 있어보이는 쪽으로 달라붙은 '눈치의
달인' 밖에 없었다.

토론 만능시대다. 언제나 방송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했다. 여러모로
머리를 써서 재빨리 감을 잡고, 제대로 된 토론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
방송의 발등에 떨어진 불임에 틀림없다.

(방송인 전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