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주인은 나다」란 생각을 신입사원 때부터 한번도 버린 일이
없습니다. 좋을 때, 정점일 때 물러나 행복합니다. 섭섭하게
생각한다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王) 회장의 그림자' 이병규 (李丙圭·50) 현대백화점 전 사장이
작년 말 경영권을 오너 3세에게 물려주고 퇴진했다. '고문' 직을 달고
있지만, "회의도 결재도 안하는, 쉬고 정리하는 자리" 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편안한 표정과 달리, 많은 샐러리맨들은 그의 퇴진을 당혹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를 대신해 최고경영자에 올라선 인물이 입사 6년째인,
서른한살의 오너 아들이란 점 때문만은 아니다. '천하의 이병규도 불과
나이 오십에 그렇게 허무하게 나가는구나' 란 생각이 샐러리맨들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던 것 같다.

현대그룹에 '가신(家臣)' 은 많지만, '충신(忠臣)' 은 몇 안된다고
한다. 이 고문은 '충신' 중 한 명이었다. 지난 76년 입사 후 고(故)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을 16년 동안 줄곧 곁에서 모신 최장기 비서,
92년 대선(大選)에서 정주영 대통령 후보의 특별보좌관을 맡았다가
비자금 조성 혐의로 19개월간 도피 생활 뒤 구속 수감….

이런 경력 때문일까. 지난 99년 현대백화점 사장에 임명돼 40대 중반에
대기업 CEO(최고경영자)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물론 그가 4년간 올린
괄목할 경영성과를 생각하면, "왕 회장에게 충성한 덕분에…" 란 평가는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다. 이렇게 26년 샐러리맨 생활을 마무리한 그에게
회사가 남겨준 것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는 현대백화점 지분은 전혀 없다고 했다. 스톡옵션이니 하는 것도 받은
일이 없다. "예전에 현대건설 주식이 조금 있었는 데 감자(減資)를 당해
지금은 가치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면 그가 '주인 의식' 을 가지고
이룬 경영성과와 희생은 결국 오너 몫으로만 돌아간 것이 아닐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정주영) 회장님도 돌아가실 때
(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지고 가셨습니다. 명예만 가지고
가셨지요. 중요한 것은 CEO로서 얼마나 좋은 이미지와 이름을
남기느냐입니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YS정권 초기 때의 「도피 생활」을 꼽았다.
"서울에 있는 5평짜리 아파트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회장님은 물론,
가족과도 일절 연락을 안했지요.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감옥이 오히려 천국이지요."

'그럼 자수해서 감옥에 가지 그랬나' 라고 묻자, 그는 "판결(1심)이
끝날 때까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야 다른 분들이 모든 걸(혐의를)
제쪽에 옮겨놓을 수 있잖아요" 라고 말했다. 정 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도망을 다녔다는 뜻이지만, 그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회장님은
(제가 대선 자금을) 제대로 처리했다고 알고 계셨는데, 제가 밖에 잘못
보여서…."

'과잉 충성 아닌가' 란 질문에 그는 "제 책임이니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고 말했다.

그는 95년 출옥(出獄) 직후 비로소 골프를 배웠다고 한다. 정 회장을
밤낮 모시다보니 골프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서실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이 회장님이 가시던 골프장(뉴코리아CC)
부킹(예약)하고 미리 가 불편이 없도록 준비하는 일이었어요. 출옥 후
골프를 배워 바로 그 뉴코리아 골프장 1번홀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니
그만 눈물이 죽 흘렀습니다."

그는 회사가 자신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옆에서
본 (정주영) 회장님의 모습이지요. 그의 기업가적 모습이 앞으로 인생을
위해 받은 가장 큰 자산입니다. 회장님을 모시면서 수백, 수천가지의
케이스 스터디(사례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현대에서 얻은 이런 자산을 가지고 1년 뒤 밖으로 나가 '새
인생' 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사업 내용은 "아직 말하기
이르다" 고 했다. 현대와는 개인적인 관계만 유지할 생각이라고 한다.

지난 89년 정 회장의 첫 방북 때 동행했던 그는, 요즘 시끄러운 현대
대북사업에 대해 "(정 회장님의 뜻과) 방향은 같은 데 '기조(基調)' 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문제가 있겠지요" 라고 말했다. '기조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엔, "허, 허, 그 얘기 그만합시다" 라며 손을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