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대북(對北) 송금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졌지만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 자리에서
밝히기 곤란하다"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특히 정 회장은 북한에
보냈다는 5억달러의 의미와 남북경협 진행 과정 등에 대해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만 계속해 진실 규명은커녕 오히려 의혹만 증폭시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5억달러는 패키지 딜

북한에 제공한 5억달러가 현대의 대북 독점사업권 획득 외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이른바 '패키지 딜'이 아니냐는 지적에 정
회장은 "순수한 사업자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걸로 보고 내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현 대통령 비서실장)과 송호경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상호 모순된 대답을 했다. 현대와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의
추진 과정에 처음부터 깊숙이 협의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또 정 회장은 "북한과 정식 협약서를 맺기 전이라도 돈을 빨리 보내는
것이 사업 성공에 필요했다"면서 "결과적으로는 (현대의 송금행위가)
정상회담 성사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는 대북사업과
정상회담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묶음'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정부와 사전 조율 없이 현대가 독자적으로 5억달러를 주기로 합의했다는
발언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000년 3~4월 정상회담 준비 접촉과
송금 규모 협상은 동시에 진행됐다. 정 회장과 박 실장은 싱가포르와
중국을 오가며 거의 동일한 날짜에 송호경과 접촉을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긴밀히 협의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지적이다. 정 회장이 박 실장과 송호경의 첫 만남만 주선했다는 주장도
양측의 접촉일자와 정 회장의 행보를 따져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 회장 스스로 "대북 경협은 현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정부 당국의 적극적 이해와 협조가 불가피하다"면서 "현대는
대북사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쳐
왔다"고 말해 '대북 패키지 딜'을 뒷받침했다.

◆청와대와 입 맞춘 흔적 역력

'정부가 정상회담을 추진할 뜻이 있었지만 북한측과 대화 통로가 없어
현대가 나서 주선했다'는 주장은 당시 남북관계를 돌아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김대중 정부는 98년 출범 초기부터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이산가족 상봉, 경제 지원 등을 통해 남북 화해 무드 조성에
나섰다. 따라서 공식 채널은 이미 열려 있었고,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비공식 루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정상회담 같은 큰일을
사기업이 먼저 나서서 남북 정부에 의사를 타진한다는 것은 상식과
어긋난다.

또 현대측이 기자회견 시기나 내용에 있어 청와대와 미리 입을 맞췄다는
인상이 짙다. 현대는 작년 9월 대북 송금 의혹이 제기될 때부터 줄곧
사실을 부인하다 지난달 감사원의 현대상선 조사결과가 나오자마자
2억달러 송금 부분만 시인했다. 그리고 청와대가 5억달러라고
발표하자마자 기자회견을 자청, 청와대 발표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이다. 나머지 3억달러의 조성 경위, 국정원 개입 등 청와대의
해명 수준을 벗어나는 의문에 대해선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대북사업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파장이 커서 당시에는 공개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과거 현대의 행적과는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지난 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위해 9억4200만달러를 북한에
주기로 했다"고 합의내용을 공개했었다. 이번 현대의 대북 7대사업
대가(5억달러)는 그보다 적은 데도 공개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돈의
성격이 '떳떳하지 못했다'는 의심을 가능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