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의 애리 플라이셔(Fleischer) 대변인은 11일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민 다수가 원한다면 주한미군 감축을 검토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냉전 종식 후, 세계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수(數)와
형태를 재고해야 한다는 파(派)들이 있다"면서 "우리는 각 지역에 맞는
미군 주둔 편제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검토가
진행되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변화하는 환경에서 우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갖춰야 할 최선의 병력구조에 관한 재검토가 부단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세계적으로 검토되는
미군 혁신 차원에서 주한미군의 편제도 재고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플라이셔 대변인은 1월 17일에는 주한미군 감축론에 대한 똑같은
질문에, "논의가 일절 없었다"고 부인했었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주한미군 재편 또는 감축 논의가 그만큼 부시
행정부 사이에서 공론화된 것이다. 국무부의 리처드 아미티지(Armitage)
부장관은 지난 4일 상원 청문회에서 "국방부가 철수라기보다는 미군을
재편하고 서울에서 조금 빠져나오는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주한미군 재편론을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료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었다. 당사자인 국방부는 도널드 럼즈펠드(Rumsfeld) 장관이
지난 3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특사단에 '미군은 환영받지 않는
곳에서는 주둔하지 않는다'는 원칙론과 함께, 용산기지 이전을 적극
추진하자는 입장을 밝혔었다. 미국 언론들은 익명의 국방부 관리들을
인용해 주한미군 재편 또는 감축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잇따라
보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을 종합하면, 미국 국방부는 비무장지대 인근에
배치된 중무장 지상군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첨단장비와 공군력, 전략적
화력 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한국군이
휴전선 방어를 책임지도록 하면서 미군은 해·공군 중심의 장거리 공격력
확보에 중점을 두려는 포석이다.
이 같은 검토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장기 과제로 추진하던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한국 내 반미감정으로 의회와 미국 내 일각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불거지면서 더욱 힘을 받게 됐다. CBS방송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인 '60분(60minutes)'은 최근 주한미군이 겪고 있는
수난을 집중 보도하면서, 주한미군 사령관이 "그래도 주둔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모습을 방영했다. 이런
프로그램은 미국 내에서 혐한론(嫌韓論)과 함께 철수론을 고조시키고
있다.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노박(Novak)과 윌리엄 새파이어(Safire)는
일찌감치 "한국이 원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미국
내 여론을 점화시켰다. 의회의 공화당 보수파는 한국의 반미감정 고조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으며, 헨리 하이드(Hyde) 하원 국제관계위원장과 로이
블런트(Blunt)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등이 주동이 되어 철수론을
전파하고 있다.
반면에 데니스 블레어(Blair) 전 태평양사령관과 전직 주한미군사령관들,
니컬러스 에버스타트(Eberstadt) 미국기업연구소(AEI) 연구원 등은
주한미군의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메아리가 미미한 형편이다.
앞으로 주한미군 논의가 본격화되면 부시 전 행정부가 1989년 마련했던
3단계 주한미군 감축론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당시 미국 상원은 샘
넌(Nunn)과 존 워너(Warner) 의원 발의로 주한미군 감축 5개년 계획안을
제출하도록 행정부에 요구했으며, 1990년 당시 딕 체니(Cheney)
국방장관은 비전투병력 5000~6000명을 먼저 철수시키는 내용의 감축안을
발표했었다.
한·미 국방당국 간에는 오는 3월부터 가동될 양국 간 협의체에서
주한미군의 장래를 본격 논의, 2004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 최종
결과를 보고할 예정이다.
(워싱턴=朱庸中특파원 midwa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