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다. 방금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것 같은
뽀송뽀송한 우윳빛 피부, 꽉 안아주고 싶을 만큼 천진난만한 표정,
작고 포동포동한 몸매. 어쩜 그리 예쁠 수가 있을까. 한데 그 분이 말씀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목소리가 크고 씩씩할 뿐 아니라 거침이 없어, 이야기를
듣다 보면 뱃속까지 후련해진다. 나는 이 모든 게 좋아서 종종
찾아뵙곤 한다.

할머니 댁에 가면 촛대·짚신·인형 같은 종이로 만든 희귀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 중에는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종이 요강이 있는데, 맛있는
죽을 담아 먹으면 딱 좋을 듯한 작고 귀여운 모양이다. 종이를 짚끈처럼
만들어 둥글게 꼬아 올려가며 앙증맞게 빚은 요강. 칠흑처럼 검은 옻나무
진액을 안팎으로 꼼꼼히 발라두어서 오줌이 샐 염려도 없다.
할머니는 오는 손님마다 이 종이 요강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낸다.

원래 이 요강은 안동 김씨 마을 대가댁의 사랑방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언젠가 들른 안동 마을에서 이 요강을 보고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당시 할머니는 이게 바구니인지, 검은 옻을 입힌 항아리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요강을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 요강은 300년 넘게 집안에 내려온 보물로, 대가댁 노마님의
6대조 시할아버지가 손녀딸이 시집갈 때 꽃가마 안에 넣어
주었다가 손녀딸의 소피와 토악질을 담은 채로 꽃가마와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종이요강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할머니는
파고다 담배한 보루를 사들고 다시 노마님을 찾았다. 잘 보이려는
마음에 마당도 쓸고 부엌일도 거들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 다음에도
되는 대로 돈을 마련해 찾아갔지만 노마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인사동에 가서 자개로 된 묵직한 말경대를
사서 노마님께 안겨드렸다. 그깟 종이 요강 하나 때문에 서울에서
안동을 세 번이나 왔다갔다 하고, 무거운 말경대까지 사 들고온 할머니가
가상했는지 노마님이 종이요강을 내놓았다.

할머니는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노마님의 권유를 뒤로 하고 허둥지둥
그 집을 나섰다. 혹시라도 노마님 마음이 변해서 다시 요강을 달라고
사람을 보낼까봐 안동땅을 벗어날 때까지도 버스 안에서 조마조마하며
가슴에 요강을 꼬옥 품고 있었다. 그 때부터 할머니는 어디에 종이
공예품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 길로 달려가 희귀한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 수집품들이 지금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한다.

하나의 작은 물건이지만 할머니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종이요강을 볼 때마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지름이 반 뼘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종이요강에 걸쳤을 막 결혼한 각시의
보드랍고 작은 엉덩이. 연지 곤지 찍고, 족두리 쓰고, 혼례복 입고,
흔들거리는 꽃가마 안에서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볼일을 보았을
각시의 부끄러움. 이 종이 요강은 단순히 오줌을 누는 그릇으로서가
아닌 오랜 시간 새색시와 함께 하면서 새색시의 설렘과 두려움 등을
지켜본, 이야기를 간직한 물건이었기에 나에게도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종이요강 하나에도 깊은 사연이 담겨 있듯이 우리 주변의 물건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에도
담겨있는 선인들의 지혜와 삶의 역사성을 우리는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그 안에 담겨있을 세대간의 대화를 읽어낼 수
있다면, 한없이 부박해져 가는 요즘의 세태에 큰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올해에는 종이요강처럼 우리 주변의 물건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

(김영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