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고양이를 닮았다. 목숨이 아홉이라는 고양이처럼 추상미(30)는
아홉개의 얼굴을 가졌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선 한 남자를 매정하게
빗속에 세워놓다가도, 또다른 영화 '미소'에서는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작가가 되어 절망적인 몸짓으로 연인을 거부한다.
지난 3일 첫 방송된 KBS 1TV 일일드라마 '노란 손수건'(연출
김종창)에선 해외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는 당찬
여사장 민주역을 맡았다. 추상미로선 99년 KBS 주말극 '사랑하세요'에
출연한 이후 3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하는 셈이다.
"제가 좀 드센 역만 맡지요? 내면이 강하고, 힘과 에너지가 넘치는….
추상미가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을 한다고 하면 어째 안 어울리잖아요.
'백지'처럼 무슨 역이든 흡입할 수 있는 배우가 부럽기도 하지만 제
강렬한 이미지도 나름의 자리가 있는 것 같아요. "
추상미가 맡은 민주는 부하직원인 상민(김호진)을 사랑하는 여성. 그
남자에게 10년간 사귄 애인(이태란)이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녀를 제치고
사랑을 '쟁취하는' 역이다.
추상미는 악역은 끝까지 나쁘고 착한 배역은 '천사표'이기만 한
천편일률적인 드라마는 질색이라고 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배역은 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는 "이번 민주 역은 틀에 박히지 않은
캐릭터이면서도 공감이 간다"고 했다.
"민주는 아버지가 비서와 재혼하고 난 뒤 외로움으로 몸부림치는,
미묘한 캐릭터예요. 상민에게서 혈육의 정을 찾으려고도 하죠.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알게 됐지만, 그 땐 이미 사랑에 빠져 더이상 그를 포기할
수 없게 된 거죠. 나쁜 여자는 아니예요."
추상미가 '노란손수건'에 망설임없이 합류한 것은 방송작가 박정란씨가
작품을 맡았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2000년 박작가가 쓴 SBS TV 설 특집극
'백정의 딸'에 출연하면서 박작가가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인물에
매혹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상미는 드라마 말고도 벌여놓은 일이 많다. 1년에 한 작품만
출연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던 그녀가 지금 방송, 영화, 연극에서 '멀티
플레이'에 나섰다. 지난달부터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파괴'를 찍고 있다. 오는
3월쯤에는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휩쓴 연극 '프루프(Proof)' 무대에
선다. 그동안 뮤지컬에 한두번 출연한 적은 있지만 연극은 97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후 5년 만이다.
"충동적으로 결정했냐고요? 맞아요, 하하. 그런데 지금 제 핏속엔
감성과 열정이 넘쳐나는 기분이 들어요. 배우로서 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서른살이 넘으면 이런 기분이 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절박함이
저를 몰아가고 있는 셈이죠."
서른살 여배우, 추상미는 어느덧 수십년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노회한
중견 여배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