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40일이 지난 요즘 국회의사당 주변에서는 “여의도에는 승자(勝者)가 없다”는 말이 나돈다. 한나라당은 물론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 의원들조차 상당수가 불안감을 토로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불안감 기저에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물갈이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고, 이런 공포는 다선일수록 더욱 심하다.
현 정부에서 잘 나간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요즘 의원들이 가장 신경쓰는 건 인터넷이고, 그 다음은 총선 후보를 국민경선 방식으로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기 공천을 노리는 특정인이나 물갈이를 원하는 특정 세력들이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 공격을 해올 경우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음은 이미 ‘인터넷 살생부’ 파문에서 드러났다. 여기에다 총선 후보를 국민참여 경선으로 뽑으면 곳곳에서 이변이 속출하고, 대대적인 물갈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속앓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숭숭한 분위기는 지난해 12월 22일 “이번 대선은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다”는 소장파들의 선언, 살생부 파문, 노무현(盧武鉉) 당선자의 “지구당위원장들은 기득권을 버려라”는 최근 발언 등으로 점점 더 심해지는 양상이다. 모두들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현장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소장파인 김현종(전주) 함운경씨(군산) 등 ‘전북 희망과 행동’ 멤버 5명은 27일 전주에서 민주당 개혁을 요구하며 출마 채비에 들어 갔다. 기존 의원들에게 공천 단계에서부터 도전하겠다는 의지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큰아들 김홍일 의원이 버티고 있는 전남 목포에도 도전자 이름이 중앙당에서부터 나오고 있고, 노 당선자의 측근인 안희정씨는 이미 자민련 이인제 의원이 버티고 있는 충남 논산에서 출마할 뜻을 내비쳤다.
자연 중진들의 발길은 지역으로 쏠리고 있다. 민주당의 대표적 중진인 김상현 의원은 요즘 1주일에 사나흘은 지역구인 광주에서 살고 있다.
한나라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울의 이재오(李在五) 의원은 매일 3~4시간을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누벼온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도 모자라 요즘엔 야간 지역구 순회로까지 활동을 늘리고 있다. 서울 종로의 박진(朴振) 의원은 매일 8~9군데의 지역구 행사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노 당선자의 고향 출신인 경남 김해의 김영일(金榮馹) 의원은 사무총장이면서도 매주 한두 번은 지역구로 내려가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대선 패배자인 한나라당의 불안 증세는 또 다른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다. 소위 ‘5적’이니 ‘10적’이니 하는 말들 속에 대선 패배 책임을 둘러싼 인적 청산론이 거의 공개적으로 나오는 실정이다.
재야 출신과 소장파 모임인 ‘국민 속으로’ 소속 의원들은 지난 27일과 28일 연이어 자체 모임을 갖고 ‘인적 청산’을 두고 내부 토론을 벌였다. 이 모임의 한 초선 의원은 “과거 공작 정치나 부정부패에 연루된 민정계”라며 5명의 중진 의원 이름을 적시하고 “이들은 당직에서 사퇴하고 다음 총선에서도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체 토론 과정에서 이견이 제기돼 결국 외부로 제기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논의 내용과 5명의 중진 이름은 이날 당내 사발통문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를 전해들은 지도부의 한 중진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가장 열심히 뛴 이가 누구인데”라며 “누가 먼저 청산되는지 두고 보자”고 말했다.
또 대부분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당의 진로와 내년 총선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고 있다. 부산 출신의 한 재선 의원은 “지금은 조용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본격적인 개혁과 사정(司正) 바람이 몰아치면 저쪽(여권)으로 갈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은 누가 스타트를 끊을지 조마조마하다”고 심정을 전했다.
대선 때 위력을 발휘한 인터넷도 적극 활용하는 움직임들이다. 송영길(宋永吉) 의원은 매일 자신의 활동을 ‘의정일기’로 홈페이지에 띄워 네티즌과 의사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장영달(張永達)·박병석(朴炳錫)·김효석(金孝錫) 의원 등은 주기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활동을 이메일로 보내고 있다. 여의도에서는 의원들이 홈페이지 관리에 신경쓰면서 대행업체 관리 비용이 크게 뛰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