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는 지난 16대 대선 후 이회창 후보의 패배로 인해 아직도 허탈감과 좌절감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일부 젊은층을 중심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개혁의지에 대한 기대로 조금씩 변화의 조짐도 보이고 있다.사진은 대구의 ‘압구정동 ’인 동성로에 젊은이들이 가득차 있는 모습.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작년 12월 19일. 대구의 모 신문사 고위 간부는 부산의 한 언론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간부는 부산 쪽에서 “하늘도 무심치 않은지 부산에는 날씨까지 흐려 사람들 심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하자 이렇게 응수했다. “대구는 사람들이 말문을 닫아버려 시내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대구는 대선 직후 전국에서 가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지역이다. 한나라당 우세지역에서 가장 높은 77.8%란 높은 지지율로 이회창 후보를 밀었던 곳인 만큼 충격도 컸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요즘, 선거 결과를 자신들의 패배인 양 받아들였던 대구 사람들은 조금씩 충격에서 벗어나는 분위기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정치 이야기는 피하려 한다.

"그거 다 끝난 이야기라요. 죽은 자식 뭐 만지기 아잉기요."
19일 금호호텔로 가는 길에 만난 50대의 택시 기사는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손사래다. 새천년 민주당 시지부 건물에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고 내건 현수막 외에는 어떤 정치적 움직임도 눈에 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겐 허탈감과 좌절감이 깊게 남아 있다. “누가 알았겠능기요… 이리 될 줄. 처음에는 손님들이 ‘인자 대구는 우째 사노’, ‘우야만 좋겠노’ 카면서 우는 사람도 많았다 아입니꺼. 테레비 신문 안 보는 것은 오래 됐고예, 케이블 티비라도 있으니까 괜찮심더.”(곽민호·남구 대명동 식당주인)

“다된 밥에 뭐 빠뜨린 기지 뭡니꺼. ×× 같은 ×들, ‘2번이 되면 대구는 다 죽는다’ 캐놓고 저거들은 뭐했노. 5년을 참고 기다렸는데 저래 됐으니…. 인자 파이라요(이제 끝났어요).” (배모씨·54세·주부·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이들은 “손 안에 들어온 걸 다 놓쳤다”며 한나라당에 대한 원망도 함께 쏟아 놓았다.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거부감과 대북 경제정책 등에 대한 불안감도 여전하다.

서민들은 원했던 사람이 낙선한 것이나, DJ정부에 대한 심판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정도다. 하지만 관료사회나 기업가들 사이에선 좌절감 같은 것이 짙게 배어 있다. 대구 시청의 한 국장급 간부는 “대부분 1번을 찍었으니 불안한 것은 사실”이라며 “특히 이곳 출신으로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공직자들의 좌절감이 큰 것 같다”고 말한다.

기업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선거 직후 “이제 끝장”이란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당선자의 노사정책이나 기업정책이 진보적이란 점만이 아니다. 외국계 보험회사 에이전트 이성희(李成熙·36)씨는 “당선자의 득표율이 가장 낮았던 지역이란 점 때문에 기업가들은 새 정부가 이 지역을 홀대하지는 않을까 하는 현실적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그동안 부산과 갈등을 빚어왔던 위천공단 추진문제 등 지역현안 해결이 어려워지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도 묻어난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지 한 달이 넘어가면서 대구지역의 정서는 두세 갈래로 분화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남대 사회학과 백승대(白承大·50세) 교수는 “30% 정도는 아직도 허탈감이나 좌절감에 젖어 있고, 30% 정도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로, 나머지는 관망 또는 무관심으로 돌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중 좌절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정권창출에 실패했고, 지역의 차기 기대주가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체념상태를 거쳐 정치적 무관심층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경북대 정외과 尹龍熙교수·62). 그런 한편으론 “이제 모두 털고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구 매일신문 문화부 이재협(李宰協) 기자는 “그동안 대구 경북에서는 지역주의에 안주, 인물을 제대로 선택해 기르질 못했다”며 “이제 지역정치를 쇄신해 제대로 야당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전했다.

젊은층은 물론, 이회창 지지자들 중에서도 일부는 허탈감에서 벗어나 노 당선자에 대한 기대쪽으로 돌아서는 흐름도 있다. 백승대 교수는 “대구 정서란 것이 반DJ이지 노무현이란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은 아니어서 잘하기만 하면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40대 택시기사 박헌정씨는 “이회창씨를 찍었지만 노무현씨가 되고 나니 이래 저래 걸리는 것이 없어 새로운 정치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는 한태환(韓汰煥·34세)씨는 “처음엔 체념했는데, 갈수록 그렇게 나빠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며 “누가 됐어도 바뀌긴 해야 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철저히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런 기대의 배경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에 대구·경북 출신 교수들이 많이 참여한 것도 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식자층 사이에서는 “이들이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이냐”는 주장과 “대구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니 지역현안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병존하고 있다.

노 당선자에 대한 기대나 주문은 주로 구태정치 타파, 부패청산 등 기성 정치권이 실패한 개혁을 제대로 철저히 해달라는 것이 많았다. 동시에 지역의 여론주도층은 노 당선자가 선거 결과 때문에 이 지역을 홀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주문을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