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당초 일정이 잡혀있던 가와구치 일본 외무장관과의
면담을 취소했다.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그 전날 있었던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 대한 항의와 분노를
이런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다.
김 대통령이 일본측에 대해'배신감'을 느꼈다면,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98년 10월 일본을 방문한 김 대통령은"20세기의
불편했던 관계를 매듭짓고 21세기를 향해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자"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임기 중'한·일과거사 문제'가
마무리됐다고 판단했던 김 대통령이었던 만큼, 자신의 퇴임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고이즈미 총리가 주변국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日帝) 전범들이 포함된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강행했다는 데 커다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고이즈미 총리의'계산된 도발'이나 김 대통령의
분노 역시 지난 과거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전임 대통령들도
똑같은 길을 갔다. 임기 초반 일본측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수사(修辭)가
곁들여진'사과'를 받아내고, 임기 후반 일본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보고 격렬히 비난하곤 했던 것이다.
도대체 한·일 양국은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할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결국 다음달 25일 출범하는 노무현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됐다. 이젠 새로운'과거사 문제'접근이 필요한 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신뢰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고, 그러려면
거꾸로 기대수준을 너무 높게 갖지 않는 게 필요하다.
우리 측은 이것이'단숨에'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닌 만큼 지속적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정부와 국민이 올바른
과거사 인식을 갖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