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품에 안겨 뒷머리를 긁적대는 난감한 표정의 필자.그 표정의 해답은 왼쪽에 걸린 빨래에 있다.직장인이자 주부로서 힘겨우신 어머니를 지도가 그려진 빨래로 괴롭힌 불효자의 모습이다.


어머니와의 살가운 추억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나는 어머니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철들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처음 들은 어머니의
노래는 당신의 모교(고려대학교) '교가!'였다.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으로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로 시작되는 그 노래를
부르실 때 어머니는 그 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신 듯 했다.

교가를 부르고 나면 조지훈 선생의 강의에 얽힌 추억을 말씀하시곤 했다.
작문 과제를 내주고 안경을 치켜올리며 먼 곳을 한참 바라보던 선비
조지훈. 물론 교가는 당신의 젊은 날로 되돌아가기 위한 타임머신일
뿐이며 어머니의 애창곡은 따로 있다. 박금호 작사, 나화랑 작곡의
노래로 한국 전쟁 직후 크게 유행했던 '향기 품은 군사우편'이다.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 소식은, 능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있는 전선 편지를 전해주던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
가서, 복받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

한국 전쟁 직후 10대 초반이셨던 어머니에게 이 노래에 얽힌 무슨
눈물겨운 사연이 있을 리는 없다. 고향 김천 집 바로 맞은 편 극장에서
호객을 위해 김천 시내가 떠나갈 듯 이 노래를 틀어놓곤 했던 것. 주의
깊게 들어서(listen)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자꾸만 들려서(hear) 귀에
익어버린 경우다.

어머니의 창법은 전통가요 특유의 창법과는 거리가 멀며, 정확한 음정과
박자로 나지막하게 흥얼거리는 쪽에 가깝다. 소리 크기만 빼면 노래방
고득점에 알맞다. TV의 전통 가요 프로그램을 보시며 거의 모든 노래를
정확하게 따라 부르시는 어머니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외할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타가 공인하는 로맨티스트인
외할아버지는 약주를 드신 날이면 잠든 어린 자식들을 깨워 리사이틀을
감행하고야 마셨던 것이다. 눈 비비고 일어나 좀처럼 끝날 줄 모르는
리사이틀에 동참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전통 동아시아 사회 질서의 근간을 예악(禮樂)에서 찾기도 한다. 부모가
부모답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하는 예의 측면 못지 않게, 부모와 자식이
함께 어울려 즐거워 하는 악의 측면도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시집간 여동생 가족을 포함해 온 가족이 노래방 가는 일을
미루기만 했다. 쉬운 일 같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족이 모두
모일 기회도 드물고, 노래방 갈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서는 용감한(?)
사람이 없던 탓이다. 새해에는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 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는' 우리 민족의 오랜 악의 전통을 가족 안에서
되살리겠노라 다짐해 본다.

(표정훈·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