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토론에 참여한 한 서울대생은 “대학 들어올 때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고 지적인 흥미도 있었지만 결국 취업에만 매달리게 됐다 ”고 말했다.(사진 제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영환,주지연,이광렬, 박준원,임현우,박해용,최소영씨)

겨울방학 중인 서울대의 한 강의실에 서울대생 7명이 모였다. 이들은
전공(專攻)도 외모도 나이도 개성도 언변도 달랐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이들을 학력이 떨어진 대학생들이라는 공통점으로만 볼 뿐이다. 참석자는
임현우(26·컴퓨터공학과 졸) 박준원(25·식품영양학과 3년)
박해용(24·경영학과 4년) 이광렬(23·의예과 2년)
손영환(22·전기공학과 3년) 최소영(21·서양사학과 3년)
주지연(20·인문학부 1년)씨다.


기자가 '학력 저하'라는 단어로 말문을 열자, 한 참석자가 용수철 튀듯
"대체 왜 우리가 학력 저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요? 그런 획일적인
잣대를 대는 이 사회야말로 '판단력 저하'입니다"라고 반발했다.

=교수님들이 "너희 선배들은 잘 풀었는데 너희들은 왜 이러냐"라고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고교 과정이 쉬워져 한번도 접해
보지 않은 어려운 문제들을 대학에 들어왔다고 금방 풀 수 있나요?
교수님 중에는 세상이 변했는데 이에 따라가지 못하고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요즘 학회 모임에서 후배들에게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져도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합니다. 영어의 경우 독해와
어휘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과거보다 듣기·말하기는 훨씬 잘해
영어 벙어리는 많이 줄었잖아요. 이런 것들이 미적분 문제를 얼마나 빨리
푸느냐보다 사회에서는 더 중요한 가치죠.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자면
옛날의 수학귀신들은 전부 '사회 미숙아'들인 셈이죠. 우리가 왜
선배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죠?

초반의 의기양양한 분위기 속에 복학생인 한 참석자가 "실제로 학번이
내려갈수록 과거에는 별것도 아닌 초월함수 미적분 문제도 잘 풀지
못한다"며 "이전에는 '전기회로' 과목에서 영어 원서를 썼는데
요즘은 그마저 어렵다고 한글 번역본을 쓴다"고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자 또 다른 참석자가 "친구들끼리 농담으로 '우리 후배들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도 밑에서 치고 올라올 일이 없어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대입수능시험의 폐해가 심각합니다. 얼마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잘 하는가가 학력의 기준이 돼야 하잖아요. 그런데 수능이 너무 쉬우니까
결국 '실수 안하기' 기술만 잔뜩 키우는 겁니다. 그런 잔기술에만 신경
쓰니 창의력이나 도전 정신이 생길 리 없죠.

=과외를 해봐도 알지만 요즘 고등학생들도 암기를 거의 안 해요. 물론
필요한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찾아내는 '노웨어(know-where)'에서는
앞서지만, 그러다 보니 지식들이 전부 머릿속을 스쳐가기만 하죠. 주입식
교육의 필요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리 '학력 저하'라고 해도 공부는 옛날보다 훨씬 많이 합니다.
과거에는 시험을 앞두고도 과(科) 단합모임으로 놀러 가곤 했는데 요즘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토입니다.

=대학생의 독서량이 적다고 비판하는데, 요즘 누가 책을 통해 정보와
교양을 얻습니까? 인터넷 등 다른 전자 매체를 활용하지요. 단순하게
독서량이 적다고 지식 총량이 떨어진다는 말은 시대착오적이죠.

=옛날에는 혼자 책을 보고 사색하는 것이 있었다면, 요즘은 인터넷
화면이 빨리빨리 넘어가고 바뀌게 되니 '깊이'가 떨어졌다고 볼 수는
있겠죠.

=저는 공대생인데 인문계 교양서라고는 2년 만에 처음으로
'백범일지'를 읽고 있습니다. 전공 분야의 공부량도 소화하기 힘든데,
다른 책을 볼 틈이 없어요. 요즘 세상에는 전문가로서 성공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려다가는 오히려
손해를 보는 분위기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특히 요즘 학생들은 문과와 이과를 넘나드는 교양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교양을 넓히고 싶어도 이과 과목을 들으려면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안돼요. 같은 수업을 듣는 자연계 학생들에게 학점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죠. 인문학은 보편적인 교양에 속하므로 자연계 학생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올 수 있지만, 이과 과목은 훨씬 특수한 분야인 셈이지요.

이 말에 자연계 참석자가 "오히려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 기초과학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교양이 아닐까요"라고 반박했다.

=컴퓨터 활용이 기본 소양이 됐듯이 세월에 따라 교양도 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복제 시대에 유전자를 알고, 우주 시대에 우주 천체에 대해
상식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 인문계 학생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현재 커리큘럼에서 이과의 교양 과목들은 수학 공식만 잔뜩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과학적 교양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부 때 교양 위주로 가르치는데 우리는 전공을 위주로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배우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어요.
어차피 회사 들어가면 학교에서 배운 전공지식이 거의 쓸모가 없는데,
대학 시스템이 학생들의 역량을 불합리하게 소모시킵니다.

=학과 공부도 잘 해야 하지만 취업 준비도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이중
부담이 가장 스트레스를 줍니다. 취직에 유리할까 봐 일부러
경제·경영학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매 학기 수강신청 전쟁을 벌이는
것도 너무 피곤합니다.

=학점을 잘 주는 강의로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몰리게 마련이죠. 수업의
질이나 내용을 생각하기보다는 학점을 잘 받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똑같은 교양 과목인데 1주일에 리포트 한 개 내고 책도 매주 2권씩
읽히는 수업은 학생수가 4명인 데 반해, 리포트도 적고 과제가 별로 없는
다른 수업은 300명 규모의 대형강의실이 꽉 차요.

=자연대·공대에서는 수학과목에서 심화반(우등반)과 보통반(열등반)으로
나뉘는데, 보통반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안 풀어도 되고 쉽게 학점도
딸 수 있어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열등감도 별로 없고요. 취직하는
데 필요한 학점만이 최우선이죠.

복학생인 참석자가 "요즘은 학점이 3.5가 넘어도 취업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는 친구들이 부지기수"라며 "서울대생은 예전처럼 졸업장만
있으면 아무데나 취직한다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보다 고시공부에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라고 덧붙였다. "대학 들어올 때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적인 흥미도 있었는데, 학년 올라가면서 부딪히는
것이 결국엔 취업 문제입니다. 좋은 데 취직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절실해요." 토론은 약간 우울하게 끝난 셈이다.

(진행=崔普植차장대우 congchi@chosun.com)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이 매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를
기초로 1992년도와 2002년도의 모습을 비교해봤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묻는 질문에, 1992년도에 23.1%로 2위였던
'친구'는 2002년도에 13.1%로 크게 낮아진 반면 ▲'돈'은 0.5%에서
2.3%로 ▲'명예'는 2.1%에서 3.6%로 ▲'권력·사회적 지위'는 0.5%에서
2.8%로 각각 높아졌다.

'입학 후 가장 큰 걱정'을 묻는 질문에, 2002년도 신입생들은
'공부'(44.0%)와 '시간관리'(38.1%)를 우선 꼽았다. '대학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질문에는 10년 전에 비해 '폭넓은
대인관계'(19.8%→34.2%)를 중시한 반면, '폭넓은 교양습득'(28.4%→
17.3%)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