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 ’를 촬영할 당시의 곽재용 감독(오른쪽 아래).

'비오는 날 수채화'로 첫 레디 고를 부르던 때가 1989년 5월. 남들보다
좀 일찍 데뷔한 때문에 벌써 감독 인생 13년 째가 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역시 크랭크 인을 하던 날. 대관령 삼양목장을 헌팅해 놓고
촬영 허가까지 받아놓았는데, 정작 촬영을 하러 스태프들을 이끌고 가
보니 목장 직원들이 농성을 하는 중이라 촬영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닌가. 게다가 신성일씨까지 도착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인데…. 결국 난 도둑촬영이라도 할 생각으로 재빨리 삼양목장과
가까운 다른 목장으로 차를 돌렸다. 내 뒤로 촬영 스태프들의 차가 열 대
이상 따라오고 있었는데, 목장을 찾아 비포장길로 산을 오르다 보니 해발
1120m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결국 마음에 흡족한 장소를 찾았다 싶었는데
웬걸, 오토바이 한 대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우리를 쫓아내려 하는
것이다. 그 때의 심정이란….

스태프들을 그 자리에 기다리게 한 뒤 1,120m 아래의 목장 사무실로 가서
두시간 이상을 졸라댔지만 무단으로 농장에 들어갔기 때문에 도저히
허가를 해줄 수 없다는 말만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동정심에 호소를 할 작정으로 직원에게 "저 오늘 처음으로 감독
데뷔하는 사람입니다. '레디 고' 한 번만이라도 불러보게 해 주세요"
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으니 그때서야 농장 직원이 피식 웃으며 잘
찍어보라고 어깨를 쳐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스태프들에게 미리 촬영 준비를 하란
말도 전하지 못하고 다시 비포장 도로를 타고 1,120m를 올라가니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있고 스태프들은 철수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태프들을 독려해서 해가 질 때까지 겨우 그날 분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난 뒤 스태프들이 첫촬영의 소감을 물을 때 "난 전생에
감독이었는지 아무 느낌도 없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무덤덤
했었다. 사실은 너무 긴장해서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무척 설렌다. 현재 찍고 있는 '클래식'
촬영장에 나가는 날마다 난 데뷔 때보다 더 설레고 밤잠을 못잘 때도
많다. 데뷔시절에 잘 느끼지 못했던 그 설렘이 즐겁기 때문에 난 지금도
영화를 찍는 일이 좋다.

(곽재용·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