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후보들의 국가경영 철학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주요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公約) 속에'문화'는 구색에
불과한 정도다. 스크린쿼터 유지나 창작지원 확대 등 현안에 대한 관심만
표명했을 뿐, 21세기 문화비전이나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예술 애호가나
문화 마인드를 지닌 후보는 없는 것일까.

아무리 외교와 내치를 잘한다고 해도 물질이 아니라 정신인 문화에 대한
철학과 청사진이 없다면 다음 정권에서도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문화욕구가 증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21세기 지도자는 문화환경을 선진화하고 문화향수권을 넓혀 국민의
문화욕구를 해소해 줄 의무가 있다.

오는 19일 대선에서'문화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사회?문화'를 다루는 세번째 TV합동토론회에서
국민은 후보들의 문화 마인드와 미래 비전, 정책과 공약을 철저히 검증하여
문화적 식견과 창의력을 지닌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 우선
TV토론회에 제기할 문화 아젠다를 추려볼 필요가 있다. 애창곡이나 감명
깊었던 책과 영화, 좋아하는 연예인 등등의 표피적 질문보다는
'문화의 세기'를 이끌 문화전략과 리더십 검증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21세기 문화비전의 제시다. 미국은 창의력 증진에, 영국의 블레어
정부는 문화예술분야를 국가경쟁력의 척도로, 프랑스는 문화교육에 중점을 둔
문화정책을 추진 중이다. 우리 문화정책도 국민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는
정책과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문화산업의 발전전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대책이다. 21세기는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민족유산의 역할이 증대되는
추세다. 개발바람에 밀려 사라져가는 근대건축과 문화명소를 지키고 가꾸는
대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문화재 보전관리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재원확보, 전통문화의 활용방안도 도출되어야 한다.

셋째는 문화복지 정책의 개발과 추진이다. 주5일 근무제를 외치면서도
국민들의 여가대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앙과 지역간의 문화편차가
심해 지역민들은 문화 소외지대에서 메마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프랑스의 문화정책 기틀을 잡은 앙드레 말로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문화적 향유를!"을 앞세워'문화의 대중화'와'문화의 분권화'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했다.

국민들은 이제 문화의 수용자에 머물지 않고 문화에 참여하고 예술을
체험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공공 문화시설의 문턱을 낮추고, 아마추어
예술활동을 장려해야 하며, 평생교육으로서의 문화체험장을 확충해야 한다.
도서관을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고, 박물관 미술관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하며, 공연장을 활성화시켜 대중이 쉽게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

선진 문화환경을 조성하고 생활문화의 고품격화를 촉진하는 것도 새
정부의 과제다. 우선 콘크리트 무덤 같은 대도시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허파기능을 할 수 있는 공원을 조성하고, 간판과 가로환경을
정비하여 사람이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사회라야 문화생활이 가능하고 생활 문화의 격이 높아진다.

다음 정부는 TV의 천격(賤格)부터 걷어내야 한다. 아무리 선진형
문화환경을 조성한다 해도 지상파 TV들이 지금처럼 저급한 프로그램을
쏟아낸다면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수신료를 부담하는
국민들은 선진국 수준의 공영방송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방송을
말초적인 오락수단에서 문화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외국과의 문화 교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문화 수신국(受信國)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문화를 세계에
발신(發信)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월드컵에서 드러냈듯이 우리
국민들은 열정과 에너지, 자신감과 자긍심이 넘쳐난다. 그것을 문화로
동력화시켜야 하며, 그런 문화역량을 지닌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할 것이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