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9일 인천앞바다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함대간의 전투가
있었다. 조선을 삼키기 위해 벌인 러·일 전쟁의 서막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러시아 함정 '바랴그호'의 선원들은 배와 함께 자폭했고,
승리는 일본에게 돌아갔다.

93년 뒤인 1997년 2월9일 인천앞바다에는 러시아의 최신형 순양함
'바랴그호'가 다시 나타났다. 러시아인들은 러·일 전쟁의 패배를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이름도 '바랴그호'로 지은 이 배를 타고 들어와 당시
숨진 장병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인천시는 두 나라간 '우호
증진'을 내세우며 배를 빌려주고 군악도 연주해 '화답'했다. 그 뒤
러시아는 매년 추모행사를 벌여왔다.

그러던 중 지난 14일 주한 러시아대사가 안상수 인천시장을 찾아와
2004년 러·일전쟁 100주년 때 당시 숨진 러시아 병사들의 위령탑을
인천앞바다에 세우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제의를 놓고 인천시
간부들 사이에서는 "전쟁의 성격상 말도 안 되는 요구"라는
반대입장과, "과거는 잊고 우호증진을 위해 허락하자"는 찬성 의견이
맞서 있다고 한다.

건망증 심한 우리가 그동안 잊어서는 안될 과거마저 쉽게 잊은 일들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는 새삼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삼키려 싸웠던 전투의 추모행사에서
군악을 연주해주고, 월미도 앞바다에 러·일전쟁 기념물을
세우겠다고까지 했던 인천시이고 보면 이 위령탑이 설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 대사가 찾아와 "우리 군인도 희생됐다"며
우호증진을 이유로 일본군 희생자의 위령탑을 세워달라고 요구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인천시의 역사 의식이 시험대에 서 있다.

(崔在鎔기자jycho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