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 IT 회사인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부사장이었던 라리타
타데미는 10년 전 회사를 떠나 자신의 가족사(史) 찾기에 나섰다. 그녀가
추적한 것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 또 그 어머니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모계(母系) 혈통이었다. 그녀가 도달한 역사의 현장은 1830년대 미국
루이지애나주(州) 케인강변의 한 농장이었다. 그로부터 타데미의
할머니들이 100년에 걸쳐 대를 이어가며 겪은 노예생활과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작년 4월 '케인강'이라는 한
편의 소설이 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들의 출생·사망 증명서와 유서,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돼 생동감을 더한다. 알렉스 헤일리의 가족소설 '뿌리'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에 많은 미국인들이 감동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요즘 미국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해 가계(家系)를 조사하고
족보를 만드는 일이 대유행이다. '족보 사이트'가 포르노 사이트
다음으로 많은 유료회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얼마 전 뉴욕타임스지도
보도했다.

뿌리찾기 열풍은 동서(東西)가 다르지 않아 한국에도 족보 사이트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을 굳이 든다면 미국의 족보는
부계(父系)와 모계(母系)를 모두 기록한다는 점이다. 그러자면 족보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컴퓨터가 이를 상당 부분 해결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족보를 부계중심으로 하느냐 모계도 포함시키느냐
하는 것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전통과 의식에 달린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족보는 1476년 간행된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로 알려져 있으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이
보존돼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고려시대에 이미 귀족들이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보아
이때부터 어떤 형태로든 족보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여기에 이름을 올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부터 여자들도 족보에 올리는 추세가 일기
시작했는데, 최근 전통적 문중으로 알려진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에서도
이를 따르기로 했다고 해서 화제다. 급속한 세상변화를 생각하면
"이제서야" 하는 한탄도 없지 않겠지만, 우리의 뿌리 깊은 부계중심
전통을 생각하면 '작은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