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는 지난 40년간 첩보 액션 장르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세련됐지만 동시에 좀 느끼하기도 한 이 고전적 첩보원은 이제 양
극단에서 강력한 라이벌 하나씩을 갖게 됐다. 빈 디젤의 '젠더
케이지'('트리플 엑스')가 제임스 본드의 양복을 벗기고 문신을
새겨낸 '블루 칼라 007'이라면, 마이크 마이어스의 '오스틴 파워'는
본드의 차가운 지성을 거세하고 우스꽝스런 욕정을 구겨넣은 '슬랩스틱
007'이다.
'오스틴 파워 골드 멤버'(15일 개봉)는 점점 더 화려해지고 있는 이
코미디의 3번째 시리즈다. 탐 크루즈와 귀네스 팰트로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로 이어지는 초반의 떠들썩한 '카메오(유명인의 깜짝 출연)
파티'는 이 시리즈가 초라했던 1편의 출발점과 달리 현재 얼마나 화려한
레이스를 펼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1편에서 1인2역으로 뛰어난 코미디
재능을 보인 마이크 마이어스는 속편이 거듭될수록 하나씩 캐릭터를
추가해 이제 1인4역까지 해낸다.
온 몸이 금으로 된 악당 '골드 멤버'가 닥터 이블과 손잡고 세계를
정복하려는데서 시작되는 이야기 얼개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시리즈를 찾는 관객이라면 그저 잔뜩 희화화된 캐릭터들이 뒤죽박죽
펼치는 음담패설과 말장난 그리고 패러디를 즐기고 싶을 테니까. 자신의
식성을 정확히 알고 이 영화를 찾은 관객들이라면 이번 속편 역시 충분히
즐길만 하다. 이 작품은 홀리스와 스틱스의 노래 제목으로부터, '양들의
침묵' '고질라'의 장면까지 종횡무진 패러디하고, 등장 인물의 이름을
비속어 비슷하게 작명해 집요하게 놀려댄다. 각각 '에이스 벤추라'와
'총알 탄 사나이'에서 익히 본 아이디어지만, 여성의 가슴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빼곡히 이어붙이는 장면이나, 커튼 뒤 그림자만 비쳐지는
상황에서 황당무계한 음담을 펼쳐내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다.
블럭버스터급으로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가 여전히 '맛있는 불량식품'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하지만 아마 이 영화는 한국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의
야비함과 뻔뻔함을 혐오할 관객도 많기 때문이다. 언어 장벽과 취향의
차이로 인해, 미국에서 폭넓게 향유되는 코미디가 이 땅에선 컬트처럼
소비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적어도 문화적 의미에서 세계화란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