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시험감독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믿음을
표현하면 학생들도 응답할 것이라는 교육적 시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내 방을 찾아왔다. "선생님, 애들이 커닝하는가
지켜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무감독 시험을 계속하시다가는 우등장학금이
커닝장학금이 될 날이 올 것 같아서요."

충격 속에서 시험감독을 재개하였다. 다시 한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커닝하는 법을 모르셔서 그런지 커닝장면을 종종
놓치시네요." 그는 각종 커닝기법을 가르쳐주었다. 축소복사된 강의노트
두루마리를 넣고 버튼으로 눌러 회전시키면서 읽는 커닝볼펜,
어깨에서부터 고무줄을 늘여 매달아놓은 소매 속 커닝 페이퍼, 먼저 나간
친구가 휴대전화로 가르쳐 주는 것 등등이었다.

옛날에도 커닝은 있었다. 앞줄에 앉은 학생이 '철수가 영희네 가게에
가서 과자를 사면…'이라고 쓴 답안지를 보고, "소비자 A가 판매자
B로부터 상품 C를 구매하면…"으로 고쳐 베껴 낸 답안지로 더 높은
학점을 받았다는 유(類)의 에피소드를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커닝 세태는 아무리 잘 보아주려 해도 낭만과는 거리가 먼
생존경쟁 같다. 커닝이 취업경쟁에서 비롯된 학점경쟁의 일환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일전에 여러 대학 교수들끼리 대학생들의 학점중독증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험 때면 학생들이 시험범위 내의 질문을 15~20개씩
퍼붓는다. 어떤 학생은 자신이 쓴 리포트가 학점을 잘 받겠는지 미리
검토를 해 달란다. B학점인데도 학점을 올린다고 재수강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한 학생당 5~10과목씩 재수강을 한다. 심지어 어머니가
자녀의 학점을 고쳐달라고 찾아오기도 한다. 학점이 나가면 B+를 받은
학생까지 항의를 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교수들은 서로 "당신네
학교도 그런가?"라며 우울해하기도 했다.

제자들에게 물었다. "학점 나쁜 것이 낭만인 시절도 있었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학점에 집착하니?" 그들은 "살아남으려고요. IMF 이후에
취직하기가 어렵잖아요"라며 풀죽어 답했다. 순간 애절하고 측은한
마음에 콧등이 시큰해왔다. 커닝으로까지 살아남아 보려는 비겁한
위선(僞善)에 격분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기운이
빠져갔다. 우리 사회는 커닝을 묵인하고 장려하는데, 그런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가 과연 학생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하는 자격지심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기는 것이 정의'라는 게임의 규칙을 갖고 있다.
구성원들은 승자가 되기 위해 전력질주를 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과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결과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자독식의
보상체계까지 갖추고 있어 게임의 승자는 모든 것을 갖는다.
돈·명예·권력·사랑·인기·명분…. 이 모든 것들이 승자들의 차지다.
승자가 이기기 위해서 저질렀던 비리는 묻힌다. 아니 주위에서 잊어준다.
반면에 패자는 가진 것조차 지키기 어렵다. 때로는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과정선(過程善)을 지키려 하겠는가? 여당
국회의원이 되면 모든 것이 묻히고 빛나는 승자가 되는데, 탈당과 이적을
한들 대수인가! 순수하다는 대학생들도 이런 세상에 나가려면,
커닝학점으로 취직 잘해 승자가 되고 싶다는 유혹을 떨치기는 어려울
게다.

우리 사회가 연줄사회라는 점도 커닝을 방관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연줄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 연줄이 생산성을 결정한다. 노동시장에
들어가도 노동자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보다는 그의 연줄이 살아남는
관건이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뼈빠지게 공부하여 실력을 쌓아도 기대에
미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학생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공부하지 않고
커닝해도 나중에 페널티가 없다는 것을, 실력이 없더라도 화려한
성적표와 졸업장만 있으면 자신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것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성과를 실현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진대, 공부보다는
휴대전화·PDA·고해상 축소복사기·투명필름 같은 첨단 커닝
테크놀로지(?)로 무장하는 것이 손쉬운 길임을 안다.

이런 사회를 방관 내지 참여한 기성세대가 과연 커닝을 질책할 수
있을까?

(서울대 교수·사회문화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