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은 북한 비밀 핵개발에 대해
정신이 깨어있게 하는(sobering) 소식'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국제문제에 관한 한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는 백악관 전문가들이
그 많은 표현을 놓아두고 이 말을 사용한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한의 실체를 새삼 실감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왠지 이 표현에
담긴 여운이 만만치 않다.
그건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가 주는 감동에 취해 달콤한 '평화의
꿈' 속에서 보낸 지난 몇 년간의 한반도 상황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서해교전으로 꽃같은 젊은이들이 숨진 비극적 사건도, 200만이
넘는 중무장 병력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숨막히는
긴장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경고나 보고도, 모두 애써
외면해 온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시의 말이 북한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한국에 대한 경고이자 일침(一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북한 핵위기를 알리는 경보음이 울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도 인정한 것처럼 이미 한·미 당국 사이에는 3년 전부터
우라늄 농축을 통한 북한의 비밀 핵개발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한은 세계적 차원에서
북한 핵 프로그램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정부와 일부 통일지상주의자들이 이런
현실에 눈 감은 채 평화무드 연출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한반도 평화나 통일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오히려
더 큰 화(禍)로 이어질 뿐이다.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김대중 정부로부터
물려받을 북한 관련 유산(遺産) 1호가 북한 핵위기라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에 가장 너그러웠던 DJ의 유산이
햇볕정책도, 금강산관광이나 경의선연결 사업도 아닌 핵위기가 된 것은
기막힌 아이러니인 셈이다.
김 대통령을 포함한 현 정부 고위관리들은 종종 "이제 북한의
개혁·개방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라는 말을 했다. 실제
그렇다는 것보다는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햇볕정책에 대한 국내외적인 비판이 많지만, 남북관계에서 분명한
역사적 족적을 남겨 놓으면 결국 차기 대통령이나 다음 정부도 'DJ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움직임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결국 북한 비밀
핵개발 소식은 지난 5년 동안 한반도에 드리웠던 몽환(夢幻)적 상태를
일깨우는 현실세계의 기상나팔인 셈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10년만에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대형 국제정치 무대로 복귀했다. 그곳은 국가간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고 때론 제로섬(Zero-sum)의 법칙이 지배하며,
작은 감상이 큰 화(禍)로 이어지는 냉엄한 세계다.
이미 미국과 북한은 냉정한 게임에 들어간 상태다. 북한 스스로 비밀
핵개발을 공개하면서 모든 현안의 일괄타결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과 '큰
판'을 벌여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부시 미국 정부도 북한
핵문제를 다시 부상시키면서 한국과 일본의 대북 러시를 동시에 견제하고
미국의 구상 속에서 한반도 상황을 끌고갈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게
됐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와 이라크 사태가 정리되는 내년 봄부터 한반도는
본격적인 미·북 핵게임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문제는 그
운명을 타개할 우리 내부의 준비다. 그 출발은 DJ 재임 5년 동안
만연했던 감상적·낭만적 대북관을 털어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미국이나 다른 한반도 주변 강국을 원망하거나, 거창한 민족우선의
구호에만 매달려서는 북한 핵게임을 풀어갈 수 없다. 상대는 철저한
계산과 전략 속에서 움직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 핵위기를 통해
새로운 틀의 남북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과제가 차기 대통령과 우리 국민들에게 던져져
있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