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죽은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 속에 들어왔다.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숨진 뒤 살아남은 딸이 아버지를 "여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과 몸매를 보면 고등학생인 딸이 분명한데, 감정과 생각은 40대
주부인 아내다. 이럴 때 당신이 남편이라면 어떻게 할까.
일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비밀(감독
다키타 요지로)'은 이같은 '설정의 기발함'이 8할을 차지하는 영화다.
빙의(憑依·한 영혼이 다른 육체에 들어가는 것)라는 현상은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 속에 적잖게 등장해 왔고 현재 제작중인 우리 영화
'중독'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형의 영혼이 남동생의 몸에
깃든 '중독'에 비해, 아내의 영혼이 하필이면 자기가 낳은 딸의 몸에
들어갔다는 '비밀'의 설정은 훨씬 더 '엽기적'이고, 또 그만큼
다분히 '일본적'이다.
눈 내리던 산길. 나오코(기시모토 가요코)와 모나미(히로스에 료코)
모녀가 타고 있던 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병원
응급실에서 나오코의 사망 직후 눈을 뜬 모나미는 자신을 나오코라고
말하고, 남편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가 믿지 못 하자 둘만 알고 있는
첫날밤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이후 짧은 치마를 입고 젊은 청년들과
학교를 다니는 나오코를 보며 헤이스케는 불안과 질투에 빠지지만, 어린
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내와 예전처럼 한 이불을 덮고 잘 수도 없다.
아내의 영혼이 깃든 딸과 그 아버지의 엇갈리는 관계를 재미있게
풀어나간 '비밀'은 한 인간의 본질이 정신에 있는지 육체에 있는지에
대한 가볍지 않은 질문을 품고 있는 영화다. 언뜻 생각에는 40대의
정신이 지배하는 10대의 육체가 또래 친구들과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지만, 막상 싱싱한 모나미의 몸을 얻은 나오코는 생각보다 쉽게
젊은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헤이스케 역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 없지만, 딸의 형상을 하고 있는 육체라는 걸림돌을 끝내 넘지 못
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역설하는 셈이다.
그러나 줄거리가 던지는 진지한 화두에 비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다지 진지하지 않다. 심령극도 비극도 아닌 로맨틱 드라마풍으로
흘러가던 영화는 영혼이 옷 갈아입듯 육체에 들락날락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분위기가 만화처럼 가벼워진다. 마지막 반전은 관객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 여지가 다분하지만 섬세하지 못한 심리 묘사 탓에 우리
관객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미지수다. 2시간 내내 내러티브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여주인공 히로스에 료코의 선 가늘고 청초한
얼굴이다. '철도원'에서 고교생 딸로 맑은 인상을 남겼던 일본의 이
아이돌 스타는 '비밀'에서 더욱 성숙한 이미지로 영화에 서정성을 한껏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