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력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문화·사회적인 모든 면에서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져 있는 금기(禁忌)를
깨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금기사항이란 공개적이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며, 그에 대한 어떠한 이의 제기도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 흑인을 차별하는
듯한 발언을 한 사람이 엄청난 고초를 당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국민들은 붉은악마의 응원을 통해 붉은색과
태극기에 대한 금기를 극복했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과거의 냉전적
사고와 국가지상주의적 전체주의 사고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알면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금기가 너무나 많이 있다.
반통일, 반노동자, 반평준화라고 낙인찍히면 그 주장의 내용과 타당성에
관계없이 반국가적이며 반국민적인 작태로 매도되고 만다.
'반(反)김정일'이 결코 '반(反)북한동포'일 수는 없으며, 폭력적
불법행위를 일삼는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이 결코 반노동자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통일논의에도, 노동운동에도 공개적으로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분명한 금기사항이다. 또 평준화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유일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한 이 수단은 목적이 되고 이에 대한 반론은 곧
판을 깨자는 것으로 오도되기 십상이었다.
의약분업이 최대의 사회적 이슈였던 때에 자세한 내용을 알 길 없는 국민
일반은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들과 우리 사회의 지성인들조차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대학 게시판의 좌파적 선동
대자보가 그 주장의 거짓과 진실을 불문하고 학교 당국이나 교수의
규제를 받거나 시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 치장하면 아무리 엉터리정책이라도 훌륭한 지도력의
발휘로 받아들여지고 만다. 서울대가 언제부터 정부를 대신해
지역균형발전의 책임을 떠맡았는지는 모르나, 신입생 지역할당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해도 이 제도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수도권에 비해 지방의 발전이 더디고
경제력이 모자라는 것이 지방출신의 서울대 입학생이 적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과학기술 발전이 우리나라 미래의 발전을 위한 국가적 과제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부터 부정확한
적성검사에 따라 문과를 선택했던 학생들이 학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대학입시에서 이공계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봉쇄돼 있는데,
이러한 교육부의 시책이 과학기술 발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이공계 출신의 사회적 보상이 낮은 이유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어긋난 편견의 탓으로 돌릴 뿐, 작금의 과학기술
교육이 사회적 니즈(needs)를 제대로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묻거나 또는
관리자로서의 재교육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과학기술계 내부의 목소리는
너무나 인색하다.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는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살아 있었다. 자기 한 목숨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집권자들에게 대드는 것은
금기사항이었으나 경향의 선비들은 바른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바른 말쟁이를 찾기는 정말 힘들다.
지성인들은 금기의 덫에 갇혀 모두들 숨을 죽이고 언론은 불편부당을
내세우며 회색논리로 일관하고 있어 국민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다양한 소수의견도 존중되고 수용되는 사회가 돼야
나라가 발전한다. 금기가 없는 사회가 돼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인과 소수의 권리가 존중되는 가운데 정의와 합리가 지배하는 진정한
민주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영혁/한국항공대 교수·항공교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