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섹스'가 브라운관을 점거했다. 흉기를 들고 화면을 휘젓는
조폭들은 드라마의 최고 '인기 캐릭터'로 떴다. 성인용 영화에 어울릴
드라마 소재와 화면도 마구잡이 전파를 타고 있다. 한달 뒤로 다가온
'드라마 등급제' 의무화를 비웃듯, TV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다.
현재 안방극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는 SBS '야인시대'. 일제시대
'주먹'들의 대결을 줄거리로 시청률 40%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나
가족용 TV드라마로선 너무 잔혹한 폭력과 욕설을 그대로 쏟아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지난 24일에도 김두한과 구마적의 부하들이 칼,
항아리 등 각종 흉기를 휘두르며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리얼'하게
방송했다.
가족 드라마를 표방하는 SBS '정'도 다를 바 없다. 지난 달 29일
재민이 주인공 철수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쳐 얼굴에 피가 흐르는
장면이 방송돼 방송위원회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유혈이 낭자한 폭행 장면이 몇 차례 여과없이 방송됐다.
MBC '리멤버'도 지난 18일 첫 회부터 주인공인 검사 동민이 무기 밀수
현장을 덮쳐 활극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하더니, 매번 범죄자들과
수사관들의 총격전, 주먹다짐이 이어지고 있다. SBS '라이벌'에도
주인공 우혁을 비롯한 여러 명의 '조폭'들이 단골이다.
선정적인 소재도 단막극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KBS
2TV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위험한 거래'는 남편 승진을 위해
부인이 남편의 직장 상사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내용. 영화
'베사메무초' '은밀한 유혹' 등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민감한
소재가 안방극장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KBS 2TV '드라마시티'는 지난
15·29일 동성애를 소재로 한 '너를 만나고 싶다' '금지된 사랑'을
잇따라 방송했다. 30일 방송될 SBS '남과 여―우연'도 동생의 결혼
상대가 자신이 낙태를 시술한 여자라는 걸 알고 고민하는 산부인과 의사
이야기다.
방송 전문가들은 11월 1일부터 '드라마 등급제'가 의무 시행되면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을 중심으로 드라마의 이런 폭력·선정성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밤 10시 이후에만 방송할 수
있는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이 거꾸로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것.
실제 일부 드라마 PD들은 드라마 등급제를 은근히 반기는 분위기다. KBS
드라마국 간부는 "일선 PD 중 일부는 '19세 이상 시청자' 판정을
받으면 과거 금기시됐던 표현의 폭을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2000년 1월1일부터 13인치 이상 TV수상기에 폭력 프로그램
여과장치인 V칩(Violence Chip) 설치를 의무화 하는 등 '가정 시청
지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당국은 프로그램 등급제 시행
이후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대비책에 무관심한 상태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은혜정 연구원은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라고 현재 기준을 넘어선 선정·폭력적 장면을 허용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면 절대 안된다"며 "방송제작자와 방송위원회는 앞으로 더
신중해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