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2003년 이후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지속 등 양국 현안뿐 아니라 국제적
관심사에 대해 특유의 화려한 화술(話術)로 '통 큰' 입장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약속 불이행을 거듭하면서
국제사회에 좀처럼 문을 열지 않던 김 위원장이 이같이 전향적인 결정을
내린 배경은 뭘까.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불량국가(rogue state)' 이미지를 벗고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에 동참하고, 지난 7월부터 실시
중인 내부 경제개혁의 성공 기반을 마련하려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우선 일·북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국제적인
핵(核)합의 준수 등을 표명한 것은 그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을 거론하면서 '북한 때리기'에 무게 중심을
둬온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아울러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임박해짐에 따라 이라크전 이후의 상황과 테러 지원국의 불명예 탈피를
고려한 조치였을 것으로 분석한다.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교수는 "납치문제 사과와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는 일본에 대한 선물의 성격도 있지만, 대테러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의 압박을 피해보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면서 "이는 미국 특사의
방북과 본격적인 미·북대화 재개를 앞두고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포석"이라고 말했다.

박철희(朴喆熙)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도 "김 위원장이 저자세에 가까울
만큼 유연하게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임한 것은 일본보다는
미국을 염두에 둔 외교 공세 성격이 강하다"면서 "특히 임박한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최소 5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는 경제협력
형태의 일본의 지원이 악화된 북한 경제 회생을 위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된다. 특히 김 위원장에게 이번 경제개혁
성패 여부는 체제 유지와 직결된 문제라는 것이다.

공노명(孔盧明) 전 외무장관은 "7월부터 실시한 가격개혁 등으로 북한
경제가 오히려 어려워진 상황에서 일본이 과거사 청산 대가로 지원하는
경제 협력은 거부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것"이라며 "지난 45년 이전의
재산청구권을 포기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