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시절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있은 가족 기념촬영.뒤줄 맨 오른쪽이 정몽준이며 이어서 바로 아래 동생인 몽윤,형 몽헌,누나 경희씨다.

◆유년시절

정몽준(鄭夢準)은 1951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정주영가(家)의 8남1녀 중
여섯 번째 아들이다. 호적상 그의 모친은 변중석(邊仲錫)씨다. 생모는
따로 있다는 설이 정가에 퍼져 있다. 이에 대해 그는 "1978년 미국
유학시절 생모라고 밝힌 한 여인의 편지를 받고서 한 번 만난 적은
있었으나 부친이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해서 그 뒤로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두 동생도 이복이다. 중학교 생활기록부의
가족란에는 그의 형과 누나만 표시돼 있고 동생들은 빠져 있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서울 장충동 집에는 삼촌과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
서로간에 대화가 많은 집안은 아니었다. 초저녁 잠이 많았던 그는 자기가
잠든 사이에 남은 식구끼리 음식을 먹은 흔적이 있으면 "왜 나를 안
깨웠느냐"며 성질을 부렸다고 한다. 그는 한방을 사용한 두 살 위의
정몽헌(전 현대건설 회장)과는 친했다. 정몽헌은 "동생이 형인 나를
누르려고 '키를 재보자'라고 하는 등 다소 짓궂은 면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장충초등학교를 다녔다. 박근혜 의원과 김승연 한화 회장, JP의
큰딸이 동기생이다. 박근혜 의원이 동기생인 줄은 정치권에 들어와서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활기차고 명랑하나 장난이
심하고 코를 병적으로 흘림'(1학년), '매사에 적극적이며 하려는
의욕이 강하나 성격이 급해 가끔 언쟁이 있고 용의가 단정치
못함'(5학년) 등으로 기록돼 있다.

◆중·고교시절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정몽준.고교시절 그는 유도부선수와 싸워 1주일 이상 결석하기도 했다.

1964년 그는 경기중 시험에 떨어져 당시 2차였던 중앙중에 입학했다.
생활기록부의 담임 의견란에는 '침착지 못해 장난이 심하고
경솔함'(1학년), '장난이 심하고 생활 주변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음'(2학년)으로 되어 있다. 3학년 때 그는 반장이 됐다. 당시
학교에서 도서관 공사를 하자 부친인 정주영씨가 시멘트 1만 포대를
기증했다. 하지만 이때도 '자주성'과 '창조성'에서는 높이
평가됐으나 '신중성'과 '안정감' 항목에서는 (X)표를 받았다. 중3 때
담임교사 임환(74)씨는 "머리는 좋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라고 기억했다.

3학년 때 성적은 490명 중 106등이었다. 국어는 전학년 모두 '미'를,
음악은 '양'(1·2학년)과 '미'(3학년)를 받았다. 영어 성적은
'우·수·우'로 좋았다. 중학교 2년 때 검사한 IQ지수는
'131'이었다.

그는 중앙고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한해에 키가 15㎝나 자라기도 했다.
취미와 특기는 '운동'으로 되어 있다. 그는 중3 때부터 스키를 탔고,
고교 시절에는 축구·농구·복싱·승마를 했다. 승마와 스키 실력은
대학시절 전국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을 정도다. 고교 동창인 한국외대
최완진 교수는 "몽준이는 털털하고 운동을 좋아했으며 나름대로
리더십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고2 때 그는 11일이나 결석했다. 사유는 '질병'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복싱을 배운 그는 학교 유도부 선수와 싸워 두들겨 팬
적이 있다. 그 뒤 유도부의 보복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1주일 이상
결석한 것이다. 그는 "이런 일에는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고 결국
등교해 많이 얻어맞고서 매듭됐다"고 말했다.

1학년 때 전교생 490명 중 84등을 했다. 그러나 2학년 때는 문과생 160명
중 5등, 3학년 때는 문과 160명 중 9등으로 뛰어올랐다. 담임의견에는
'노력형'(2학년), '온순하고 성적이 우수함'(3학년)으로 나와 있다.
2학년 때 희망대학란에 '서울대 상대(商大)'로 기입했다.

◆대학·유학시절

정몽준은 경기도 양평 등에서 2년 4개월 간 육군 경리장교로 복무했다.

1970년 서울대 상대에 들어갔다. 그 해 1학년 2학기말 문화사 과목
시험에서 커닝을 해 무기정학을 받았다. 2학기 신청과목의 학점이 모두
말소됐다. 이듬해 재수강을 해 학점을 땄다. 이에 대해 그는 "젊은 날
공부를 하지 않아 저지른 실수"라고 말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부친
정주영은 학과 교수들을 울산의 현대계열사로 초청 대접하는 등 학교에
더욱 신경을 썼다.

그의 대학 성적은 4.3점 만점에 2.9점이었다. 그는 학과 공부는
별로였지만 당시 유행한 문고판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장식용으로
집에 꽂혀 있던 문학전집류도 대부분 섭렵했다. 그는 "책이 있으면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버릇으로 요즘도
국내에서 발행되는 주간지·월간지를 빠뜨리지 않고 읽는 편이다.

대학 3~4학년 때 그는 ROTC 훈련을 받았다. 75년 ROTC 13기로 소위에
임관했다. 그는 통역장교를 지원했지만 시험에 떨어져 2년4개월 동안
경기도 양평 등지에서 경리장교를 지냈다. 중위로 전역한 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을 거쳐 MIT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그 즈음 형수의 중매로 부인 김영명(金寧明·46)씨를 만났다. 김씨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4남2녀 중 막내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미국 일본 등 외국에서 생활한 그녀는 당시 미국 웨슬리 대학의
정치학도였다. 이 대학은 힐러리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다닌
명문여대다. 1년간의 열애 끝에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대학 2년생인 아들, 대학 1년생인 딸, 미국에 유학 중인 고3인 딸,
늦둥이인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있다. 대학 다니는 딸은 아버지가
누구라는 걸 지금껏 주위에 숨겨왔다. 그래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그의
현재 가족 사진이 이번에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입문 이후

그는 1980년 '기업경영의 이념'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부친 정주영은 "서문은 참 잘 썼다"라고 흐뭇해했다고 한다. MIT를
졸업한 1980년, 현대중공업에 상무로 입사했다. 2년 뒤 사장이 됐다.
당시 현대계열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현대중공업을 여섯째 아들인
그가 맡은 것이다. 정주영은 생전에 "성격이 찬찬한 애는 전자(電子)를
시키고 대범하게 해보고 싶어하는 애는 중공업을 시키고 성격대로 맡기는
거지"라고 밝힌 적이 있다.

84년 12대 총선 직전 정주영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찾아가 아들의
국회의원 출마 건을 상의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현대의 빚이 그렇게
많은데도 출마해 돈을 쓴다면 누가 개인 돈으로 정치한다고
여기겠는가"라고 막았다. 그래서 불발됐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93년 '일본에서의 정부와 기업 관계'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88년 13대 총선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그의
정치 입문은 부친 정주영의 뜻이었을까. 이에 대해 그는 "대학 다닐
무렵 정치에 마음을 뒀다"라며 "한 집안의 명예가 쌓이려면 부(富)도
있어야 하지만 공직에서 일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정주영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그는
정책위부의장과 부산·경남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부산의
기관장들이 선거를 앞두고 '초원복집'에서 김영삼 후보 지지를
논의하는 현장을 도청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선고유예를 받았다. 그는
"불법 선거를 감시한 수단만 왜 문제를 삼느냐"고 말했다.

1993년 그는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았다. 해외 출장을 가면 그는 호텔
객실에서 와이셔츠와 속옷을 직접 빨아 널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스위스 호텔에는 러닝 셔츠 하나를 맡겨도 굉장히 비싸고 이 정도는
내가 직접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처음 내려갔을 때 임원들이 앉아 있는 회의실에 불이 켜있자 사전 양해도
없이 꺼버린 적도 있다. 그는 "낭비하는 것은 일종의 죄라고
생각한다"라며 "아내도 가끔 내게 너무 짜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총선 때 총선시민연대로부터 낙선운동 대상에 지목됐다.
15대국회 4년간 법안 발의가 1건, 결석률은 82.5%였기 때문이다. 16대
지난 2년간 본회의 125회 중 62번 출석했다. 현대계열사의 한 임원은
"그는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윗사람으로 모시기가 까다롭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중순 지리산 등반 때 그는 등산코스는 물론 점심
메뉴까지 직접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