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사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 입국 전에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점과
수많은 여성들이 순교를 자청했다는 점 등이다.
강완숙(姜完淑:1760~1801)은 여성 순교의 중심에 있는 여성이다.
이승훈(李承薰)이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서 영세 받기를 자처해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것이 정조 8년(1784)이다. 10년 뒤인 정조 18년
12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 천주교인 지황(池璜) 등의
안내로 조선인 역부(驛夫)로 가장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강완숙은 이미 천주교 신자였다.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중인 역관 최인길(崔仁吉)이 마련한 서울
북쪽의 은신처에 숨어서 포교 활동을 개시했으나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리고 말았다. 중국어를 아는 역관 최인길이 대신
신부행세를 하며 잡혀가면서 시간을 벌었으나 주신부는 갈 곳이 없었다.
이때 강완숙이 자기 집 광을 새로운 은신처로 제공함으로써 주신부는
체포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강완숙의 집 광에 주신부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남편과 떨어져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집안에 외간
남자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강완숙은
충남 내포(內浦)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충청도 덕산(德山) 홍지영(洪芝榮)의
후처로 시집갔다. 그녀가 어떤 경위로 북경의 예수교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강완숙은 이 책을 읽고 당시로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던 이 신앙을
서슴없이 받아들였다.
그녀가 이 신앙의 대가로 받은 첫 번째 시련은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진사 윤지충(尹持忠)이 부모의 신주를 태워버린 사건으로
신해교난(辛亥敎難·1791)이 발생했을 때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음식을
날라주다가 구류를 산 것이었다. 아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두려웠던
남편은 별거를 요구했고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홍필주(洪弼周)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이처럼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별거 당한
여자가 외간남자인 천주교 신부를 집안에 들여놓은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고민에 빠진 그녀가 병에 걸린 후에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시어머니는 광에 숨어있던 주신부를 사랑방으로 옮기게 했다. 이후
그녀의 집은 6년 동안 사실상 교회이자 주교관으로 조선 선교의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주 신부는 그녀에게 영세를 주고 조선 교회 최초의 여회장(女會長)으로
삼아 여인들의 전도를 담당시켰고, 그녀는 자기 집을 거점으로 삼아
신앙공동체를 꾸려나갔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이 신앙이 자신을 천당으로
인도할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조선을 보다 넓은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을 믿었다. 소현세자가 17세기 중반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조선을 개방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천주교는 조선 개방의 상징이기도 했다.
천주교의 여회장이 된 강완숙은 위로는 왕실부터 아래로는 여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들을 천주교로 인도했다. 당시 경희궁에는
은언군(恩彦君)의 부인 송(宋)씨와 그 며느리 신(申)씨가 살고 있었다.
은언군은 강화도에 귀양가 있었고, 그 아들은 사형 당했으므로
양반가에서 태어나 왕실로 시집온 이 여인들에게 현실은 절망뿐이었다.
강완숙은 주신부를 모시고 가서 현실에서 절망한 이 여인들에게 영세를
주게 했고, 두 왕실 여인을 정약종이 주재하던 교리연구단체
'명도회(明道會)'에도 가입시켰다. 두 여인은 자신의 시비(侍婢)들까지
모두 입교시켜 경희궁은 한때 교인들의 궁전이 되었다.
주 신부가 충청도 내포로 지방전도를 나선 것도 이 지역이 그녀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주 신부는 전라도 전주까지 지방 포교에 나섰는데,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그가 입국할 때 4000여명이었던 신자수는 5년
후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강완숙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가 금지됐지만 내부적으로는 관대했기 때문에 몇 번의
박해는 있었어도 천주교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양반층에서
천주교를 주로 받아들인 세력은 집권당인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들이었다.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벽파의 공세를 근근히 막아내며 천주교를
보호해왔다.
이런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세상을 뜨고 11살의 순조가 즉위한
것은 천주교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대신 수렴청정하게 됐는데, 노론 벽파인 그녀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모는 데 한몫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순조 1년(1801) 정월 10일 천주교를 반역죄로 다스리라는 사학(邪學)
엄금 교서를 내리는 것으로 세계 천주교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유(辛酉) 대박해의 문을 열었다.
이가환(장사·杖死)·정약종(사형)·이승훈(사형)·정약용(유배)·
정약전(유배) 등 수많은 남인들이 투옥된 후 형을 받았다. 강완숙도
1801년 2월 24일 전처 아들 홍필주와 함께 체포됐다. '순조실록'
1년 10월조에서 "강완숙(姜完淑)이 여류들의 괴수인데, 주문모(周文謨)란
자를 집에 숨기고는 성명과 거주지를 어지럽게 변경하여 속인 간사한
형상이 수없이 많으므로 누차 고문(拷問)을 더하였으나, 죽기를 작정하고
버티어 굳세게 숨겼다"라고 쓴 대로 여성 신자들의 수괴이자 주문모
신부의 은닉혐의로 6회나 주리(周牢)를 트는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녀는 "그분이 전에는 내 집에 계셨으나 지금은 모르겠다"면서
부인으로 일관해 형리에게 "이는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다"라는
탄복을 낳기도 했다. 그녀는 오히려 홍필주가 심한 고문으로 마음이
약해지자 "왜 눈이 어두워져 영혼을 죽이려 하느냐. 하늘의 복과
낙을 생각하라"고 권유해 배교를 막았다.
그녀가 소재지를 부인하는 동안 주신부는 수색망을 뚫고 국경선까지
도망갔으나 "네가 교인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돌아와 그 해 3월 12일 스스로 의금부에 나아가 자수했다.
주신부는 1801년 4월 19일 한강의 새남터에서 참형 당함으로써 최초의
외국인 신부이자 최초의 외국인 순교자가 됐다.
강완숙도 그 해 5월 23일 자신이 전도한 궁녀 출신 강경복·문영인 등
다른 4명의 여성들과 서소문 밖 처형장으로 끌려갔는데, "우리들은
여자이니 사형수의 옷을 벗기는 규정을 쓰지 말아달라"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가장 먼저 형을 받았다. 이때 그녀의 나이
41세,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증오했던 불행한 한 시대의 유산을 한
몸에 안고 그녀는 영원한 사랑의 세계로 스스로 나아갔던 것이다.
●은언군과 순교왕족들
은언군(1755∼1801) 이인(李▩)은 사도세자와 숙빈(肅嬪) 임(林)씨
사이에서 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홍국영(洪國榮)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담에게
정조의 뒤를 잇게 하려다 상계군은 사형 당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귀양갔다.
노론 벽파의 계속된 사형 요구를 정조가 거부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던
은언군은 순조 즉위 후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가
체포되자 탈출을 감행하다 체포됐다. 결국 은언군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는 모두 사사(賜死) 당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50여년 후인 1849년 은언군의 손자 덕완군(德完君)이 즉위,
철종이 된다.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그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데는
천주교를 둘러싼 이런 비극적 가계에도 이유가 있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태종 이방원의 공동창업자 원경왕후 민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