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차관 인사 때 물러난 이경호 전 보건복지부 차관이 재임하던 당시인 지난 4월 13일. 한·미 통상문제로 방한한 미국 상무부 윌리엄 래시 차관보 및 그 수행원들이 면담을 위해 이 전 차관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면담 주제는 우리 정부의 약값 인하정책과 관련된 ‘약값 실무협의회(working group)’ 구성 문제였다.

래시 차관보는 자리에 앉자마자 왜 협의회 구성을 미루느냐고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이미 한·미 간에 협의회 구성에 합의를 본 사실을 설명하던 이 차관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래시 차관보의 수행원들조차 상관의 비외교적 언사에 당황해했고, 방 밖에서 대기하던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얼굴도 흙빛이 됐다. 면담은 불과 몇 분 만에 끝나버렸다. “오해하는 것 같아 설명하려 했지만 막무가내이니….”

이 전 차관이 당한 일은 약값 인하정책을 저지하려는 다국적 제약사, 미국 등 외국 정부의 통상압력과 로비 과정에서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미국측이 우리 정부를 대하는 태도는 ‘내정간섭’이라도 하듯 고압적인 것이었다. 작년 7월 에번스 미 상무부 장관은 김원길 전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약값 제도 변경이 미국 의약품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고 통상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하기도 했다.

결국 복지부는 지난해 10월 참조가격제 추진을 중단해야 했고, 약값 실무협의회는 미 대사관 직원까지 참석해 그들의 주문을 전달하는 통로가 돼 버렸다.

그리고 지금 약값 인하정책의 실패로, 절감하지 못한 돈이 단순 산술계산상 1661억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작년 말 건보 재정의 적자는 2조4000억원으로 늘었다. 미국과의 통상마찰을 피하려고 우리 정부가 좌고우면하는 사이,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