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신화를 계승하는 과제를 놓고 온 나라가 지혜를 모으고 있다.
히딩크식 경영을 도입하자는 제안부터 시청 앞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이번
신화의 가장 큰 성과는 우리 민족 모두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태극전사들의 기량이 유럽의
축구 강국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릴 때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절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승리를 더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던 높은 수준의
응원문화였다. 어느 국민인들 제 나라 선수들이 승리할 때 기뻐하지
않겠는가마는 우리 국민은 전 세계의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정말이지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의 거리응원을 선보였다. 동원이
아닌 자발적 참여를 통해 민족공동체가 복원된 자리에는 관중의 안전을
위협하는 훌리건,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하는 배타성, 그리고 축제의
후유증인 무질서가 전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심지어 패배했을 때도
우리는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전 세계가 주목했다. 대한민국의 훌쩍 커버린 축구실력은 물론이고
이를 뒷받침한 온 국민의 성숙한 응원문화가 전 세계의 지면과 화면을
'붉게' 물들였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만큼 국가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또 정당하고 자랑스럽게 홍보할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믿어지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동안 단편적인 모습만을 드러내던 '한류(韓流)'는
이렇게 2002년 6월 서울발 '문화의 태풍'이 되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반응은 제 각각이었다. 우리에게 분루를 삼켜야 했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은 심판의 편파적 판정이라는 생트집을 부렸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관객은 태풍 '붉은 악마'의 등장에 환호했다. 축구
중진국이 축구 선진국으로 변신하는 모습에 전 세계의 스포츠팬들은
'오, 필승 코리아'를 같이 외쳐 주었다. 동북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흐르던 한류가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도 한국처럼
하자'라는 태풍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결과 베트남 국민들은 다른 누구보다 우리의 결승 진출을 염원했고,
또 심지어 우리의 영원한 '적(敵)'인 일본의 젊은이들조차
'대~한민국'에 박수를 쳐주었다. 북한마저도 한국―이탈리아 경기를
방송하며 '소리 없이' 서울발 태풍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2008년 올림픽 개최국 중국은 월드컵 초반 서울발 태풍을
누구보다 반기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한때 한류의
중심지였던 중국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요즘
'대한견국(大韓犬國)'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배경을 놓고 구구한 억측이 많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바로 중국 당국이 시청 앞에 모인 '붉은 악마'의 엄청난 에너지를 보고
이를 경계하게 되었다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실린 천주욱 대표의
견해다. 1989년 천안문에 모인 군중에 혼이 난 중국에 서울발 '태풍의
눈'인 광화문의 거리응원은 아닌 게 아니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문화였을 것이다. 반면 '민중의 힘(People Power)'으로 두 번
정권을 바꾼 필리핀에서 서울발 태풍 '붉은 악마'의 응원문화는 너무나
친숙한 경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 국민들은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을 다른 누구보다 반겨주었다.
때맞춰 삼성 필리핀 현지법인은 필리핀 체육위원회와 엄청난 규모의
기금을 지원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앞으로 3개월 동안 현지에서 팔리는
모든 삼성 제품에서 1달러씩을 갹출해 필리핀 대표팀이 9월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비용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문화와 경제가
맞물린 서울발 태풍은 비바람을 동반한 물리적인 태풍에 시달리던 필리핀
국민들에게 모처럼 환한 미소를 던지고 있다.
(유석춘/연세대 교수·필리핀대 연구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