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별 기대가 없다. 그저 7개월
남짓 남은 임기를 대과없이 잘 마치고 조용히 초야에 묻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 남은 7개월 남짓을 어떤 식으로든 휘젓고 간다든지
자신의 불쾌한 심경을 여과없이 국정에 반영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다.

엊그제 발표한 개각의 내용이 사람들을 불안하고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거기엔 남은 임기를 여·야 및 정치권과 마찰없이 잘 마무리하고
월드컵으로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국내 단합의 분위기를 살려내겠다는
배려의 흔적이 없다. 개각의 언저리에는 「너희가 뭐라해도 나는 나대로
가겠다」는 식의 심술과 고집과 무리와 앙갚음 같은 것이 배어있다.
그래서 퇴장길에 들어선 노(老)대통령, 자식을 둘씩이나 감옥에 보내고
있는 「개혁 대통령」의 말로(末路)를 측은하게 여기거나 연민의 눈으로
보던 사람들의 실망을 다시금 자아내고 있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여성 총리의 등장을 환영하는 듯 하지만 사실 「여성
존중」이라기보다 「여성 이용」이라는 얄팍한 포퓰리즘에 장상
총리서리가 희생되고 있다는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 기껏해야 7개월짜리
총리 자리를 그것도 험한 인준 과정을 고려하지도 않고 선심쓰듯이 내준
처사를 고맙게(?) 받은 당사자가 안쓰러워보일 정도다. 여성 총리가
그처럼 시대적 당위였다면 김 대통령은 왜 여성 총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기회를 다 제쳐두고 이제 부담만 잔뜩 짊어질, 그래서 자칫
「실패한 여성 총리」로 남을 수도 있는 시점에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인가. 새삼 「DJ의 머리」에 식상해진다.

법무부 장관과 복지부 장관 그리고 정통부 장관에 이르러서는 김
대통령이 국민 여론이라는 것, 최소한의 정치적 도리라는 것조차 이제
괘념치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법무부장관의 경질이 자식들의
구속과 기소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인사권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 자질에 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약값 인하와 관련해
다국적 제약기업의 로비로 복지부 장관의 목이 달아났다면 그것 역시
막가는 인사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신임자에 대한 부담과 배려
때문에 일을 잘하고 있는 정통부 장관을 경질했다면 도대체 어떤
인사들이 그런 분위기에서 일하겠는가. 대통령의 고유권 인사권은
국민들의 수긍이 있을때 가능한 것이지 「내멋대로 인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제까지 자신이 총재였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와
당대표마저 개각의 내용을 수긍하기는커녕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김 대통령과 청와대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DJ의 민주당 탈당과
절연을 내세우지만 국민에게는 그것이 정치적 중립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화풀이처럼 들릴 뿐이다. 대통령은 집권당을 떠났어도
집권당이라는 정치권과 무관할 수 없고 국정을 위해서는 감정을 죽이고
이성을 살려야 하는데도 김 대통령의 「탈당 운운」에는 『나보고
나가라고 했잖아』라는 치기가 엿보일 뿐이다.

문제는 나라와 국민과 앞으로 7개월이다. 이 긴박하고 중요한 시기를
우리는 「고장난 리더십」 속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지난 서해사태에서는 과거의 DJ답지 않은 「태도이탈」을 보였다. 특히
국방당국이 서해교전에 관한 최종보고서에서 「북한의 계산된
도발」이라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국군통수권자로서 국민에게, 또 북한에
이렇다할 말 한마디없이 입다물고 있다. 전상자에 대한 국민의 성금이
답지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구경꾼이 되고
있다.

이런 대통령,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날카롭게 대립해 있는 여·야,
청와대와 여당, 청와대와 야당등이 혼재(混在)하며 제멋대로 튕기고
뻣대는 앞으로 7개월, 나라가 어디로 갈지 그것이 걱정이다. 그리고
모처럼 얻은 국민 대단합의 기운이 이런 제멋대로 청와대, 「편집증
대통령」과 막가는 「끝내기 정치」로 훼손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김대중/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