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8강 신화를 이룩했던 북한선수들의 모습.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 바 있는 북한에서도 축구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높다.
1999년 탈북해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윤명찬(53) 전 북한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만나 이번 월드컵 경기를 지켜본 감회와, 북한 축구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들어봤다.

―이번 한·일 월드컵에 대한 소감은?

『한마디로 감동적이었다. 1966년 북한의 분위기도 상당했다. 당시 TV가
없어 라디오로 생중계했는데 새벽 2시에 경기가 시작됐는 데도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특히 방송중계를 맡았던 아나운서 이상벽의 말솜씨에
모두들 넋을 뺐다. 4강 진출을 위한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북한이 3골을
선취하고도 나중에 3대5로 역전될 때는 울면서 중계해 유명해졌다.』

―당시 귀국한 북한 선수들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을 법한데.

『모두 「공훈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신영규·박두익·오윤경은 그보다
한 등급 위이자 최고의 영예인 「인민체육인」이 됐다. 그러나 세계
올스타에도 뽑혔던 탁월한 수비수 신영규와 골키퍼 리찬명, 미드필더
림중선, 명례현 감독 등은 68년 지방으로 추방되는 불운을 겪었다. 67년
5월 갑산파 숙청 이후 이들의 여독을 청산하는 사상투쟁이 벌어지면서 그
여파가 체육계에도 미쳤던 것이다. 결국 「계급적 토대」(성분)가 좋지
못했던 이들이 희생양이 됐다. 공시학과 염철수, 박승진 등은 나중에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요덕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북한이 8강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을 분석한다면?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국방력 강화 차원에서 체육을 크게 장려했다.
그때 벌써 6개의 체육선수단이 프로 리그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먹는
것도 장관급 이상으로 특급 대우를 했다. 「전면 공격, 전면 수비에
의거한 중장거리 속도경기체계를 확립하라」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체력강화 위주로 훈련을 실시한 것이 주효했다. 체격조건이 좋은
유럽선수들에게 밀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선수들마다 한 가지
이상의 특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조직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신영규는 힘이 좋고 헤딩을 잘했으며, 오른쪽 날개인
한봉진은 스피드가 뛰어나고 센터링이 예리했다. 중앙공격수 박두익은
감각이 탁월했고, 공격수였던 양성국은 드리블과 페인팅이 일품이었다.』

―이후 북한 축구가 침체된 이유는?

『60년대 말 선수들이 정치적으로 휘말리면서 원만한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이 때 대(代)가 끊겼다. 세계적인 축구발전
추세를 따라가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됐다. 김정일이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어 전반적인 실력은 향상됐으나 세계
축구의 수준은 그보다 몇 단계 더 앞서가고 있었다.』

―외국인 감독이나 코치를 기용하려는 시도는 없었나?

『1994년 미국 월드컵에 대비해 92년 독일인을 감독으로 영입해 도약을
꾀한 적이 있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월 10만달러에 1년 계약으로
데리고 와 나중에 계약을 1년 연장했다. 체력적으로 준비가 부족한
선수들을 데리고 유럽식으로 기초훈련과 전술위주로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실제 경기에서 금방 체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예선에서 힘이 좋은
이란 등의 중동선수들과 맞붙어 번번이 지고 말았다.』

―현재 북한 축구의 수준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93년 12월 제15차
미국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한 이후 김정일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한
10년 문을 닫아걸고 훈련을 잘해서 키워 가지고 나가라」고 한마디 한
적이 있었다. 이후 북한은 월드컵 무대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북한의 한·일 월드컵 TV방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파격적이다. 태극기 펄럭이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경기를 지켜본 주민들도 같은 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